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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작은 부엌 노래 / 문정희

by 혜강(惠江) 2020. 5. 17.

 

 

 

 

 

작은 부엌 노래

 

- 문정희




부엌에서는
언제나 술 괴는 냄새가 나요.
한 여자의

젊음이 삭아가는 냄새
한 여자의 설움이
찌개를 끓이고
한 여자의 애모*
간을 맞추는 냄새
부엌에서는
언제나 바삭바삭 무언가

타는 소리가 나요.
세상이 열린 이래
똑같은 하늘 아래 선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큰방에서 큰소리치고
한 사람은
종신 동침 계약자, 외눈박이 하녀로
부엌에 서서
뜨거운 촛농*을 제 발등에 붓는 소리.
부엌에서는 한 여자의 피가 삭은

빙초산* 냄새가 나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모르겠어요.
촛불과 같이

나를 태워 너를 밝히는

저 천형* 덜미를 푸는
소름 끼치는 마고할멈*의 도마 소리가

똑똑히 들려요.
수줍은 새악시가 홀로

허물 벗는 소리가 들려와요.
우리 부엌에서는 …… 

 


     - 시집 어린 사랑에게(1991) 수록

 

 

시어 풀이

 

*애모 : 사랑하며 그리워함.

*촛농 : 초가 탈 때 녹아 흐르는 것. 또는 흘러서 엉긴 것. 촉루(燭淚).

*빙초산 : 수분이 5% 이하로 섞인 아세트산. 자극성의 냄새가 있고 신맛이 나며, 무색의 액체로 물과 알코올에 잘 녹는다조미료로 쓰며 식물의 저장, 유기 화합물의 제조, 염색 등에도 쓴다16이하에서 얼음 결정을 이루기 때문에 빙초산이라 한다.       

*천형(天刑) : 하늘이 내린 형벌. 천벌(天罰).

*마고할멈 : 전설에 나오는 신선 할미. 태초에 이 세상의 지형을 형성한 대지모신(大地母神) 성격의 창조신적 존재.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여성이 일하는 공간인 부엌을 배경으로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억압적 현실을 다양한 심상을 통해 형상화하고 있으며, 여성이 자기 정체성을 찾아 삶의 주체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 시는 여성이 불평등한 결혼 제도와 가부장적 억압의 현실에서 벗어나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여 주체적인 삶을 영위해야 함을 시사해 주는 작품이다. 따라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결혼 제도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가 나타나 있다.

 

 이 시는 부엌이라는 공간이 지닌 상징적 의미를 통해 시상을 전개하고 있는데, 다양한 감각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억압받는 여성의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 1행에서 11행까지는 부엌을 배경으로 힘든 가사 노동으로 인해 정체성을 상실해 가는 여성의 모습과 항상 속이 타는 억눌린 삶을 노래하고 있다. ‘부엌은 주로 여성이 사용하는 공간이다. 화자는 첫 마디로 부엌에서는/ 언제나 술 괴는 냄새가 나오라는 표현으로 지아비를 위해 술을 만드는 모습을 통하여 가부장적 억압 속에 살고 있는 여성의 모습이며, ‘젊음이 삭아가는 냄새에는 여성의 소멸적 삶을 모습이다. 이어 찌개를 끓이고’, 간을 맞추는 냄새등 가사 노동에 시달리는 여성들의 모습과 그 과정에서 겪는 고통과 아픔을 후각적 심상을 통하여 형상화하고 있다. , ’바삭바삭 무언가 타는 소리는 억눌려 살면서 속을 태우는 여성의 모습을 청각적 심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반복하여 사용된 서술어인 냄새가 나요라는 어미는 차분한 어조이면서도 억울한 심정을 드러내는 듯한 느낌을 준다

 

 12행에서 20행까지는 불평등한 결혼 제도 속에서 여성이 겪는 고통이 드러나 있다. 화자는 먼저 남녀간의 불평등을 꼬집는다. 똑같은 사람인데 남자는 부엌과 대조되는 큰방에서 큰소리나 치는 권위적인 삶을 살아가고, 여자는 종신 동침 계약자외눈박이 하녀처럼 굴욕적이며 순종을 강요받는 삶을 살아간다. 그래서 부엌에서는 뜨거운 촛농을 제 발등에 붓는 소리여자의 피가 삭은/ 빙초산 냄새가 난다고 한다. 이것은 고통스럽고 한스러운 여성의 삶을 후각과 청각적 심상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처럼 가부장적 사회에서 가사 노동에 얽매어 고통을 받았던 여성의 모습을 앞 부분에서 그려 냈다면, ‘그런데로 시작되는 21행부터는 시상이 전환된다. 그것은 현실의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주체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짐은 천형의 덜미를 푸눈/ 소름 끼치는 마고할멈의 도마소리수줍은 새악씨가 홀로/ 허물 벗는 소리에서 드러난다. ‘마고할머니는 여성의 출산을 도와주는 신으로 여성의 천형과도 같은 삶을 풀어주는 긍정적 이미지이며, ‘새악씨가 홀로/ 허물 벗는 소리는 속박에서 벗어나 주체적 여성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청각적 이미지로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모두 여성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것들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부엌에서는……이라는 우리 부엌을 사용한 것은 여성이 억압적 현실을 극복하고 자신의 주체성을 찾는 것이 단 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여성 모두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엌이 억압과 고통의 공간에서 주체적인 정체성을 획득하는 여성의 공간으로 바뀐 만큼, 그 공간의 주인은 여성 모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말없음표로 끝냄으로써 우리 부엌은 더 이상 속박과 설움의 공간이 아닌, 자기 정체성을 찾은 주체적 여성의 공간임을 암묵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는 단순히 여성의 억압적 현실을 나타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앞으로 여성이 나아가야 할 방향까지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자 문정희(文貞姫: 1947 ~ )

 

 

  여류 시인. 전남 보성 출생. 동국대학교 국문과에 재학 중이던 1969월간문학신인상에 당선하며 문단에 첫발을 내딛였다. 그의 시는 여자들에게 살과 피를 주고, 잃어버린 욕망을 되찾아준다. , 서정을 주제로 하여 불교 미학의 순수성을 우리말로 표현하여 보다 애송적(愛誦的)인 시의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시집으로 첫 시집인 꽃숨(1965) 이후 문정희 시집(1973), 새떼(1975),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1984), 아우내의 새(1986), 찔레(1987), 우리는 왜 흐르는가(1987), 하늘보다 먼 곳에 매인 그네(1988), 제 몸속에 살고 있는 새를 꺼내주세요(1990), 별이 뜨면 슬픔도 향기롭다(1992), 남자를 위하여(1996)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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