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
- 문정희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
한 그루
찔레로 서 있고 싶다
사랑하던 그 사람
조금만 더 다가서면
서로 꽃이 되었을 이름
오늘은
송이송이 흰 찔레꽃으로 피워 놓고
먼 여행에서 돌아와
이슬을 털 듯 추억을 털며
초록 속에 가득히 서 있고 싶다
그대 사랑하는 동안
내겐 우는 날이 많았었다
아픔이 출렁거려
늘 말을 잃어 갔다
오늘은 그 아픔조차
예쁘고 뾰족한 가시로
꽃 속에 매달고
슬퍼하지 말고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무성한 사랑으로 서 있고 싶다
- 시집 《찔레》(1987)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사랑의 고통을 이겨 낸 화자를 '찔레'로 비유하여, 임과의 이별로 인한 사랑의 아픔을 성숙한 사랑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화자인 ‘나’는 사랑하는 임과의 이별의 아픔을 수용하고,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사랑의 아픔을 아름다운 사랑으로 인식하고 있는 역설적 발상을 드러내는 이 시는 의미상 첫 연과 마지막 연이 대응을 이루고 있는 수미 상관의 구조이다. 그리고 1연, 3연, 마지막 연에서도 ‘서 있고 싶다’라는 유사한 내용이 반복하여 사용함으로써 화자의 소망을 강조하고 있다.
1연에서 화자는 ‘초록이 흐르는 계절에/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 한 그루/ 찔레로 서 있고 싶다’라고 한다. ‘초록이 흐르는 계절’은 생명력이 고조되는 시기이며, 화자는 이때를 맞아 가슴에 꽁꽁 묻어 두었던 그리움을 열어 ‘찔레’로 서 있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찔레’는 임에 대한 화자의 사랑을 담은 대상물이다.
2연~3연에서 화자는 사랑하던 그 사람이 ‘조금만 더 다가서면/ 서로 꽃이 되었을 이름’이라며, 조금 더 다가서지 못해 이루지 못한 사랑을 아쉬워한다. 그래서 화자는 사랑을 이루지 못한 아픔으로 오랜 방황을 하며 한다. 그러나, 언제까지 방황할 수 없음을 깨달은 화자는 ‘먼 여행에서 돌아와/ 이슬을 털 듯’ 아팠던 사랑의 추억을 털어버리고, ‘꽃이 되었을 이름’을 ‘송이송이 흰 찔레꽃으로 피워 놓고’ ‘초록 속에 가득히 서 있고 싶다’라고 한다. ‘초록’과 ‘흰’의 색채의 대비를 통해 시상을 전개하는 이 대목은 사랑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으로 아파하던 추억들을 털어버리고, 이제는 이루지 못한 사랑을 ‘송이송이 흰 찔레꽃’에 담아 피우겠다는 소망을 표현한 것이다. ‘송이송이 흰 찔레꽃’의 ‘송이송이’는 찔레꽃이 무더기로 피어 있는 모습을 표현하는 부사어로 '많음, 풍성함, 여유, 아름다움' 등의 다양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시어는 풍성함과 아름다움의 속성을 이용하여 ‘절절했던 사랑의 아픔’과 ‘풍성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꽃 피우고자 하는 중의적 내용을 시각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4연~5연에서는 화자가 잠시, 사랑의 아픔으로 실의에 빠졌던 나날들을 돌아본다. 그때는 사랑으로 인해 괴로워하던 날이 많았고, ‘아픔이 출렁거려/ 늘 말을 잃어 갔다’라고 회상한다. ‘아픔이 출렁거려’라는 표현은 ‘아픔’이라는 추상적인 관념을 구체화하여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6연~7연에서 화자는 그 시절의 아픈 사랑을 아름다운 사랑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오늘은 그 아픔조차/ 예쁘고 뾰족한 가시로/ 꽃 속에 매달고/ 슬퍼하지 말고/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무성한 사랑으로 서 있고 싶다.’라고 마무리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의 아픔이 아름다운 옷으로 갈아입고 새롭게 태어난 모습을 발견한다. ‘예쁘고 뾰족한 가시’는 찔레가 그 안에 가시를 숨기고 있으나 아름다운 꽃을 피워 내는 속성에 빗대어 사랑의 아픔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화자는 새로운 모습을 갈아입은 ‘초록’의 계절에, 슬퍼하지 말고, ‘무성한 사랑으로 서 있고 싶다’라는 말로 지난날 사랑의 아픔을 아름다운 사랑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이 시가 지니는 정신적인 가치는 아픈 사랑의 추억을 가슴에 담아 두고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아픈 사랑을 떠올리며, 사랑의 아픔까지도 포용하고 성숙한 사랑으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데 있다고 하겠다.
▲작자 문정희(文貞姫: 1947 ~ )
여류 시인. 전남 보성 출생. 동국대학교 국문과에 재학 중이던 1969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당선하며 문단에 첫발을 내딛였다. 그의 시는 여자들에게 살과 피를 주고, 잃어버린 욕망을 되찾아준다. 또, 서정을 주제로 하여 불교 미학의 순수성을 우리말로 표현하여 보다 애송적(愛誦的)인 시의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시집으로 첫 시집인 《꽃숨》(1965) 이후 《문정희 시집》(1973), 《새떼》(1975),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1984), 《아우내의 새》(1986), 《찔레》(1987), 《하늘보다 먼 곳에 매인 그네》(1988), 《제 몸속에 살고 있는 새를 꺼내주세요》(1990), 《별이 뜨면 슬픔도 향기롭다》(1992), 《남자를 위하여》(1996) 등이 있다.
*해설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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