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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이제 오느냐 / 문태준

by 혜강(惠江) 2020. 5. 26.

 

이상원 화백의 작품 - 춘천 이상원미술관에서 촬영

 

 

이제 오느냐

 

- 문태준

 

 

화분에 매화꽃이 올 적에

그걸 맞느라 밤새 조마조마하다

나는 한 말을 내어놓는다

이제 오느냐

 

아이가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올 적에

나는 또 한 말을 내어놓는다

이제 오느냐

 

말할수록 맨발 바람으로 멀리 나아가는 말

얼금얼금* 엮었으나 울*이 깊은 구럭* 같은 말

 

뜨거운 송아지를 여남은* 마리쯤 받아낸 내 아버지에게 배냇적*부터 배운

 

            - 시집 《그늘의 발달》(2008) 수록

 

◎시어 풀이

*얼금얼금 : 굵고 얕게 얽은 자국이 듬성듬성 있는 모양.
*울 : 속이 비고 위가 트인 물건의 가를 둘러싼 부분.
*구럭 : 새끼를 드물게 떠서 물건을 담을 수 있도록 만든 그릇.

*여남은 : 열이 조금 넘는 수.
*배냇적 : 어머니의 배 속에 들어 있을 때.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하는 ‘이제 오느냐’ 라는 말에 담긴 의미와 가치를 새로운 시각에서 탐구하고 형상화한 시이다. 화자는 일상적인 상황과 언어를 소재로 생각을 펴쳐 나가는데, ‘이제 오느냐’라는 말을 하는 경우를 들어, 동일한 시구를 반복하여 운율을 형성하고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1연에서 ‘이제 오느냐’라는 말은 어느 늦겨울 조마조마하게 기다리던 화분의 매화꽃을 보고 하는 말이며, 또 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아이를 기다리다가 하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이제 오느냐’라는 간단한 말속에는 애틋함, 기다림 끝에 오는 반가움, 기쁨, 속 깊은 사랑과 정의 정서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이 시의 작자인 문태준 시인이 ‘이제 오느냐’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지금도 ‘이제 오느냐.’ 라는 말을 입안에 넣고 굴리면 첫맛은 쓰고 나중에는 단맛이 입안에 돈다. 왜 더 일찍 오지 않았냐는 아쉬움과 책망의 맛도 있지만, 이제라도 와서 고맙다는 안심의 뜻이 이 말에는 담겨 있다. 〈중략〉 우리는 자기 몫의 격랑의 바다를 한 척의 배처럼 건너갈 것이지만, 가족은 그 건너가는 한 척의 배를 그이보다 더 격렬한 고통으로 바라보는 이들이다. 그런 가족 곁에서 이따금은 쓸쓸하면서도 따뜻한 말, ‘이제 오느냐.’ 라고 물어 줄 일이다. 이 말이 푸른 우물처럼 얼마나 속이 깊은 말인지 우리의 아이들은 당장 알지는 못하겠지만.” (문태준, “느림보 마음”- 마음의 숲, 2013)

  어잿든 화자는 이 말을 두고 2연에서는 ‘이제 오느냐’에 담긴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말할수록 맨발 바람으로 멀리 나가는 말’이며, ‘얼금얼금 엮었으나 울이 깊은 구럭 같은 말’이라고 한다. 여기서 ‘맨발 바람’은 맨발로 마중을 나갈 만큼 매우 반가운 마음을 뜻하는 것이며, ‘얼금얼금 엮었으나 울이 깊은 구럭 같은 말’은 투박한 말 같지만 깊은 마음, 속 깊은 뜻이 담긴 말이라는 의미이다. 즉, ‘이제 오느냐’ 라는 말은 흔하고 단순하며 지극히 일상적인 말 같지만 간절한 기다림과 애틋함 끝에 맞이하는 반가움과 기쁨이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3연에서 화자는 ‘이제 오느냐’라는 말이 ‘뜨거운 송아지를 여남은 마리쯤 받아 낸 내 아버지에게 배냇적부터 배운’말이라고 한다. 즉 이 말은 묵직한 인내를 지닌 아버지에게서 태어나기 전부터 배운 말이며, 어른이 된 자신 또한 익숙하게 사용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제 오느냐’ 라는 말의 핵심이 ‘이제’임을 고려한다면, 이 말은 인내하는 삶의 지혜와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상당한 기다림을 겪어 내야만 기다리는 대상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시는 화려한 수식이나 시적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매화꽃, 맨발, 구럭, 송아지’등의 토속적 어휘를 사용하여 인간적인 사랑, 기쁨, 반가움은 긴 인내 뒤에 온다는 가치를 새롭고 참신한 발상을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

 

▲작자 문태준((文泰俊, 1970 ~ )

 

  시인. 경상북도 김천 출생.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시〈處暑〉외 아홉 편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사소한 자연물도 귀하게 여기며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순박한 정서를 통해 전통 서정시의 계보를 잇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2000), 《맨발》(2004), 《그맘때에는》(2005), 《가재미》(2006), 《그늘의 발달》(2008), 《먼 곳》(2012),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2015)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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