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노동의 새벽 / 박노해
by 혜강(惠江)
2020. 5. 27.
노동의 새벽
- 박노해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아
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 가지
설은*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오래 못 가도
끝내 못 가도
어쩔 수 없지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늘어쳐진 육신에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 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줏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 시집 《노동의 새벽》(1984) 수록
◎시어 풀이
*설은 : 열매, 밥, 술 따위가 제대로 익지 아니한. 여기서는 변변치 않은, 보잘것없는 의미임.
*짬밥 : ‘잔반’에서 변한 말로, 군대에서 먹는 밥을 이르는 말. 여기서는 보잘것없고 형편없는 밥을 의미함. 오랜 노동 시간 중 잠깐 틈을 내어 다급하게 먹는 밥으로 해석하기도 함.
*깡다구 : 악착같이 버티어 나가는 오기를 속되게 이르는 말.
▲이해와 감상
노동은 인간의 삶을 유지시키는 신성한 행위다. 하지만 노동이 삶 자체를 파괴한다면 그 노동은 고통이 된다. 이 시는 1980년대 노동 문학의 대표작으로 열악한 노동 현실 속에서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세상에 대한 희망과 모순 극복의 의지를 노래하고 있다.
이 시의 제목에서 ‘노동’은 현실의 고통과 절망을 의미하며, ‘새벽’은 그러한 현실 속에서도 희망과 사랑을 지피려는 결연한 의지를 상징한다. 시인은 노동자의 관점에서 노동의 현실을 일상어와 노동 현장의 언어로 극한적인 절망의 현실을 극복하려 한다.
1연에서 화자는 ‘전쟁 같은 밤일’의 가혹한 철야 노동의 현실에 체념하며 차가운 소주를 붓는다. 그러면서 ‘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라는 말을 반복하며 위기감을 드러낸다. 2연에서는 노동의 열악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변변치 못한 세끼 밥을 먹으며, 기름투성이의 체력전을 치러야 하는 일은 전쟁이나 다름 없다.
이러한 현실에 체념하는 화자는 3연에서 이러한 현실을 벗어나려는 욕망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한다.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이라는 표현은 고통스럼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의 비명 소리와도 같다. 그러나 화자는 곧 ‘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라며, 현실을 벗어지 못하는 현실 앞에서 갈등을 일으킨다.
4연에 오면, 화자는 열악한 현실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며 시상이 전환된다. 1연의 ‘차가운 소주를 붓는’ 행동이 체념이었다면, 4연에 오면 ‘분노와 슬픔’을 붓는 행동으로 바뀐다. 여기서 ‘분노와 슬픔’은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에서 보듯이 체념을 넘어서는 힘이 된다.
마지막 5연은 현실 극복의 결연한 태도를 보여준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이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을 지불하고서라도, ‘우리들의 사랑’과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차가운 소줏잔을 돌리며 붓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노동자의 햇새벽’은 노동 해방을 통한 인간 해방의 소망이며, 소줏잔을 돌리며 붓는 행위는 부조리한 노동 현실을 개선하고 노동자가 정당한 인간으로서 대우받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노동자들끼리 저항과 연대의 술잔을 나누는 의미인 것이다. 즉, 새로운 변혁을 위한 각성의 의미로 시상이 마무리된다.
이 시는 산업화 시기, 경제 성장의 주역이면서도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생존을 위협하는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노동자들의 애환을 나타내고,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개혁 의지를 제시한 노동 문학의 새 장을 연 작품으로 평가된다.
▲노동문학의 개척
노동문학은 박노해 시인이 1984년 《노동의 새벽》을 출간하면서, '노동 문학' 이라는 새로운 영역이 우리 문학사에 자리 잡게 되었다. 《노동의 새벽》은 기존의 작품들과는 달리 '구체적 현장성'과 '실천적 운동성', '고도의 예술적 형상화 능력'이 어우러져 본격적인 노동 문학의 장을 열어 놓았다. 특히 박노해의 시는 지식인의 관념이 아닌, 노동자가 직접 경험하는 노동 현장의 현실적 삶이 노동자의 언어로 형상화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한편 이러한 노동 문학은 1970년대 김수영, 신경림 등으로 대표되는 민중 문학의 연장선 상에서 문학적 전통을 계승하고, 1980년대와 1990년대 한국 사회의 심층적 모순을 형상화하는 새로운 방법으로서, 우리 문학의 저변 확대와 다양성 확보에 크게 기여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작자 박노해(朴勞解, 1957 ~ )
시인. 본명은 기평. 필명인 박노해는 ‘박해받는 노동자 해방’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본명은 기평이다. 전남 함평 출생. 1983년 《시와 경제》에 <시다의 꿈>, <하늘>, <얼마짜리지>, <바겐세일> 등 여섯 편의 시를 발표하며 ‘얼굴 없는 시인’으로 문단에 나왔다.
노동자 출신의 시인으로, 사회 제도와 이념에 대한 저항을 투쟁적이고 선동적으로 보여주었다. 첫 시집으로 《노동의 새벽》(1984)이 나오기까지 7년간 시인은 노동자로 전전하며 노동운동가로 단련의 시기를 거쳤다고 한다. 사노맹 사간으로 투옥되어 고초를 겼는 등 파란만장한 길을 걸었다. 현재는 평화·나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시집으로 노동 문학의 시작을 알린 《노동의 새벽》 외에 《참된 시작》(1999), 《사람만이 희망이다》(1997),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2010) 등이 있다.
- 해설 및 정리 : 남상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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