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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1798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 김기택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 김기택 텔레비전을 끄자풀벌레 소리어둠과 함께 방 안 가득 들어온다어둠 속에 들으니 벌레 소리들 환하다별빛이 묻어 더 낭랑하다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큰 울음 사이에는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그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한다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까맣고 좁은 통로들을 생각한다그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여린 마음들을 생각한다발뒤꿈치처럼 두꺼운 내 귀에 부딪쳤다가되돌아간 소리들을 생각한다브라운관이 뿜어낸 현란한 빛이내 눈과 귀를 두껍게 채우는 동안그 울음소리들은 수없이 나에게 왔다가너무 단단한 벽에 놀라 되돌아갔을 것이다하루살이들처럼 전등에 부딪쳤다가바닥에 새카맣게 떨어졌을 것이다크게 밤공기를 들이쉬니허파 속으로 그 소리들이 들어온다허파도 .. 2020. 4. 21.
바퀴벌레는 진화 중 / 김기택 바퀴벌레는 진화 중 - 김기택 믿을 수 없다, 저것들도 먼지와 수분으로 된 사람 같은 생물이란 것을.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시멘트와 살충제 속에서만 살면서도 저렇게 비대해질 수 있단 말인가. 살덩이를 녹이는 살충제를 어떻게 가는 혈관으로 흘려보내며 딱딱하고 거친 시멘트를 똥으로 바꿀 수 있단 말인가. 입을 벌릴 수밖엔 없다, 쇳덩이의 근육에서나 보이는 저 고감도의 민첩성과 기동력 앞에서는. 사람들이 최초로 시멘트를 만들고 집을 짓고 살기 전, 많은 벌레들을 씨까지 일시에 죽이는 독약을 만들어 뿌리기 전, 저것들은 어디에 살고 있었을까. 흙과 나무, 내와 강, 그 어디에 숨어서 흙이 시멘트가 되고 다시 집이 되기를, 물이 살충제가 되고 다시 먹이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빙하기, 그 세월의 두.. 2020. 4. 21.
멸치 / 김기택 멸치 - 김기택 굳어지기 전까지 저 딱딱한 것들은 물결이었다 파도와 해일이 쉬고 있는 바닷속 지느러미의 물결 사이에 끼어 유유히 흘러다니던 무수한 갈래의 길이었다 그물이 물결 속에서 멸치들을 떼어냈던 것이다 햇빛의 꼿꼿한 직선들 틈에 끼이자마자 부드러운 물결은 팔딱거리다 길을 잃었을 것이다 바람과 햇볕이 달라붙어 물기를 빨아들이는 동안 바다의 무늬는 뼈다귀처럼 남아 멸치의 등과 지느러미 위에서 딱딱하게 굳어갔던 것이다 모래더미처럼 길거리에 쌓이고 건어물집의 푸석한 공기에 풀리다가 기름에 튀겨지고 접시에 담겨졌던 것이다 지금 젓가락 끝에 깍두기처럼 딱딱하게 잡히는 이 멸치에는 바다가 있다 그 바다에는 아직도 지느러미가 있고 지느러미를 흔드는 물결이 있다 이 작은 물결이.. 2020. 4. 21.
두물머리 / 김남주 두물머리 - 김남주 만나면 금방 하나가 된다 물은 천봉만학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져 골짜기로 흐르다가도 만나면 만나기만 하면 물은 금방 하나가 된다 어디서고 웅덩이에서고 강에서고 바다에서고 나 오늘 경기도 양평 땅에 와서 두 물이 머리를 맞대고 만난다는 두물머리란 데에 와.. 2020. 4. 21.
고목(古木) / 김남주 고목(古木) -김남주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해를 향해 사방팔방으로 팔을 뻗고 있는 저 나무를 보라.주름살투성이 얼굴과상처 자국으로 벌집이 된 몸의 이곳저곳을 보라.나도 저러고 싶다 한 오백 년쉽게 살고 싶지는 않다 저 나무처럼길손의 그늘이라도 되어 주고 싶다. - 시집 《조국은 하나다》(1988)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고목’을 바라보면서 화자가 얻은 깨달음을 통해 시련을 극복하고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다짐하는 것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 글에서‘고목’은‘오래된 나무’라는 의미에서 더 나아가 화자가 부러워하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다. 화자는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길손에게 그늘을 드리워 주는 고목을 예찬하면서 자신도 희생하는 삶을 살리라 다짐하고 있다... 2020. 4. 20.
시인(詩人) / 김광섭 시인(詩人) -김광섭 꽃은 피는 대로 보고 사랑은 주신 대로 부르다가 세상에 가득한 물건조차 한 아름 팍 안아 보지 못해서 전신을 다 담아도 한 편(篇)에 2천 원 아니면 3천 원 가치와 값이 다르건만 더 손을 내밀지 못하는 천직(天職). 늙어서까지 아껴서 어릿궂은 눈물의 사랑을 노래하는 젊음에서 늙음까지 장거리의 고독! 컬컬하면 술 한 잔 더 마시고 터덜터덜 가는 사람 신이 안 나면 보는 척도 안 하다가 쌀알만한 빛이라도 영원처럼 품고 나무와 같이 서면 나무가 되고 돌과 같이 앉으면 돌이 되고 흐르는 냇물에 흘러서 자국은 있는데 타는 놀에 가고 없다. -시집 《성북동 비둘기》(1969) 수록 ◎시어 풀이 *천직(天職) : 타고난 직업이나 직분. *어릿궂은 : ‘어리궂은’의 잘못. 매우 어리광스러운 ▲이.. 2020. 4. 20.
생의 감각 / 김광섭 생의 감각 - 김광섭 여명(黎明)의 종이 울린다. 새벽별이 반짝이고 사람들이 같이 산다. 닭이 운다. 개가 짖는다. 오는 사람이 있고 가는 사람이 있다. 오는 사람이 내게로 오고 가는 사람이 다 내게서 간다. 아픔에 하늘이 무너졌다. 깨진 하늘이 아물 때에도 가슴에 뼈가 서지 못해서 푸른빛은 장마에 넘쳐흐르는 흐린 강물 위에 떠서 황야에 갔다. 나는 무너지는 둑에 혼자 섰다. 기슭에는 채송화가 무더기로 피어서 생의 감각을 흔들어 주었다 - 《성북동비둘기》(1969) 수록 ◎시어 풀이*여명(黎明) : ① 희미하게 밝아 오는 빛. 그런 무렵. ② 희망의 빛.*황야(荒野) : 거친 들판. 황원(荒原). ▲이해와 감상 이 시 ‘생의 감각’은 생.. 2020. 4. 19.
산(山) / 김광섭 산(山) - 김광섭 이상하게도 내가 사는 데서는 새벽녘이면 산들이 학처럼 날개를 쭉 펴고 날아와서는 종일토록 먹도 않고 말도 않고 엎댔다가는 해 질 무렵이면 기러기처럼 날아서 틀만 남겨 놓고 먼 산 속으로 간다 산은 날아도 새둥이나 꽃잎 하나 다치지 않고 짐승들의 굴 속에서도 흙 한 줌 돌 한 개 들성거리지 않는다 새나 벌레나 짐승들이 놀랄까봐 지구처럼 부동의 자세로 떠 간다 그럴 때면 새나 짐승들은 기분 좋게 엎대서 사람처럼 날아가는 꿈을 꾼다 산이 날 것을 미리 알고 사람들이 달아나면 언제나 사람보다 앞서 가다가도 고달프면 쉬란 듯이 정답게 서서 사람이 오기를 기다려 같이 간다 산은 양지바른 쪽에 사람을 묻고 높은 꼭대기에 신을 뫼신다 산은 사람들과 친하고 싶어서 기슭을 끌고 마을에 들어오다가도 사람.. 2020. 4. 19.
광장 / 김광균 광장 - 김광균 비인 방에 호올로 대낮에 체경(體鏡)을 대하여 앉다. 슬픈 도시엔 일몰이 오고 시계점 지붕 위에 청동 비둘기 바람이 부는 날은 구구 울었다 늘어선 고층 위에 서걱이는 갈대밭 열없는 표목(標木) 되어 조으는 가등(街燈) 소리도 없이 모색(暮色)에 젖어 엷은 베옷에 바람이 차다 마음 한구석에 벌레가 운다 황혼을 쫓아 네거리에 달음질치다 모자도 없이 광장에 서다 - 《와사등》(1939) 수록 ◎시어 풀이 *체경(體鏡) : 온몸이 비치는 큰 거울. 몸거울. *서걱이는 : 무엇이 스치거나 밟히는 소리가 잇따라 나는 *열없는 : 어설프고 짜임새가 없는. *표목(標木) : 푯말. *가등(街燈) : ‘가로등(街路燈)’의 준말. *모색(暮色) : 날이 저물어 가는 무렵의 어스레한 빛. ▲이해와 감상 이 .. 2020. 4. 19.
추일서정(秋日抒情) / 김광균 추일서정(秋日抒情) - 김광균 낙엽(落葉)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포화(砲火)에 이즈러진 도룬 시(市)의 가을 하늘을 생각게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 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차가 들을 달린다 포푸라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낸 채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세로판지(紙)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쪽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간다 - 《인문평론》(1940) 수록 ◎시어 풀이 *포화(砲火) : 총포를 쏠 때 일어나는 불. *도룬시 : 폴란드의 도시 이름. *.. 2020. 4. 19.
달팽이의 사랑 / 김관규 달팽이의 사랑 - 김광규 장독대 앞뜰 이끼 낀 시멘트 바닥에서 달팽이 두 마리가 얼굴 비비고 있다. 요란한 천둥 번개 장대 같은 빗줄기 뚫고 여기까지 기어 오는데 얼마나 오래 걸렸을까 멀리서 그리움에 몸이 달아 그들은 아마도 뛰어왔을 것이다. 들리지 않는 이름 서로 부르며 움직이지 않는 속도로 숨 가쁘게 달려와 그들은 이제 몸을 맞대고 기나긴 사랑 속삭인다. 짤막한 사랑 담아둘 집 한 칸 마련하기 위하여 십 년을 바둥거린 나에게 날 때부터 집을 가진 달팽이의 사랑은 얼마나 멀고 긴 것일까 - 시집 《좀팽이처럼》(1991)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달팽이’라는 평범한 소재를 사용하여 시련과 역경을 딛고 천천히 사랑을 완성해 가는 삶의 가치를 일깨우고 있다. 이 시는 난.. 2020. 4. 18.
매미가 없던 여름 / 김광규 매미가 없던 여름 - 김광규 감나무에서 노래하던 매미 한 마리 날아가다 갑자기 공중에서 멈추었다. 아하 거미줄이 쳐 있었구나 추녀 끝에 숨어 있던 거미가 몸부림치는 매미를 단숨에 묶어버렸다. 양심이나 이념 같은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후회나 변명도 쓸데없었다. 일곱 해 동안 다듬어 온 매미의 아름다운 목청은 겨우 이레 만에 거미 밥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 걸리면 그만이다 매미들은 노래를 멈추고 날지도 않았다. 유달리 무덥고 긴 여름이었다. - 시집 《대장간의 유혹》(1991) ▲이해와 감상 이 시는 객관적 상관물인 ‘매미’와 ’거미‘를 통해 권력에 의해 민중이 일방적으로 억압당하는 세력에 대하여 우회적으로 비판한 글이다. 이 시에서 ’매미‘는 약자 또는 억압받는 민중을 상징하고, 이에 대응하여 거미줄을 .. 2020. 4. 18.
묘비명(墓碑銘) / 김광규 묘비명(墓碑銘) - 김광규 한 줄의 시(詩)는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꿋꿋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史料)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詩人)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1979)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화자가 묘비명을 보면서 권력의 기만적인 통치술과 그에 아첨하는 세력, 그리고 비이성적인 대중들의 모습을 통하여 현대사회를 비판한 작품이다. 이 시는 ‘시’와 ‘돈’의 대비를 통해 주제 의식을 드러내고 있으며, 정.. 2020. 4. 18.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 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버렸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 2020. 4. 18.
대장간의 유혹 / 김광규 대장간의 유혹 - 김광규 제 손으로 만들지 않아한꺼번에 싸게 사서마구 쓰다가 망가지면 내다 버리는플라스틱 물건처럼 느껴질 때나는 당장 버스에서 뛰어내리고 싶다.현대 아파트가 들어서며 홍은동 사거리에서 사라진털보네 대장간을 찾아가고 싶다.풀무질로 이글거리는 불 속에시우쇠처럼 나를 달구고모루 위에서 벼리고숫돌에 갈아시퍼런 무쇠 낫으로 바꾸고 싶다.땀 흘리며 두들겨 하나씩 만들어 낸꼬부랑 호미가 되어소나무 자루에서 송진을 흘리면서대장간 벽에 걸리고 싶다.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온통 부끄러워지고직지사 해우소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는똥덩이처럼 느껴질 때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문득어딘가 걸려 있고 싶다. - 시집 《대장간의 유혹》(1991) :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수록 ◎시어 풀이·.. 2020. 4. 18.
상행(上行) / 김광규 상행(上行) - 김광규 가을 연기 자욱한 저녁 들판으로 상행 열차를 타고 평택을 지나갈 때 흔들리는 차창에서 너는 문득 낯선 얼굴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너의 모습이라고 생각지 말아 다오 오징어를 씹으며 화투판을 벌이는 낯익은 얼굴들이 네 곁에 있지 않느냐, 황혼 속에 고함치는 원색의 지붕들과 잠자리처럼 파들거리는 TV 안테나들 흥미 있는 주간지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 다오 농약으로 질식한 풀벌레의 울음 같은 심야 방송이 잠든 뒤의 전파 소리 같은 듣기 힘든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아 다오 확성기마다 울려나오는 힘찬 노래와 고속도로를 달려가는 자동차 소리는 얼마나 경쾌하냐 예부터 인생은 여행에 비유되었으니 맥주나 콜라를 마시며 즐거운 여행을 해 다오 되도록 생각을 하지 말아 다오 놀라울 때는 다만 '아!.. 2020. 4. 17.
초생달 / 김강호 초생달 - 김강호 그리움 문턱쯤에 고개를 내 밀고서 뒤척이는 나를 보자 흠친 놀라 돌아서네 눈물을 다 쏟아내고 눈썹만 남은 내사랑 - 《한국단시조156편》(2015)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3연 9행의 정형 시조로, 전통적인 가락에 충실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시의 제목인 ‘초생달’은 초승에 뜨는 달인 ‘초승달’의 방언이다. 이걸 모를 리 없는 시인이 굳이 ‘초생달’로 쓴 것은 초승달이 도시보다는 농촌이나 산촌에서 보아야 잘 보이고, 또 보름달과는 다르게 초저녁에 잠시 나타나 눈썹 모양을 한 짙은 슬픔이 배어있는 듯한 형상이므로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처럼 보인다. 초승달은 달이 지구와 태양 사이 일직선상에 놓이는 그믐달을 지나 보름달로 채워져 가는 시기의 초반에 나타나는 모습으로, 음력 초사흗날에 .. 2020. 4. 17.
홀린 사람 / 기형도 홀린 사람 - 기형도 사회자가 외쳤다 여기 일생 동안 이웃을 위해 산 분이 계시다 이웃의 슬픔은 이분의 슬픔이었고 이분의 슬픔은 이글거리는 빛이었다 사회자는 하늘을 걸고 맹세했다 이분은 자신을 위해 푸성귀 하나 심지 않았다 눈물 한 방울도 자신을 위해 흘리지 않았다 사회자는 흐느꼈다 보라, 이분은 당신들을 위해 청춘을 버렸다 당신들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 그분은 일어서서 흐느끼는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분에게 박수를 쳤다 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들은 실신했다 그때 누군가 그분에게 물었다, 당신은 신인가 그분은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유령인가, 목소리가 물었다 저 미치광이를 끌어내, 사회자가 소리쳤다 사내들은 달려갔고 분노한 여인들은 날뛰었다 그분은 성난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 2020. 4. 17.
질투는 나의 힘 /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 시집 《입속의 검은 잎》(1991)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미래의 시점에서 현재의 ‘나’의 모습을 성찰함으로써 현재의 자기 삶에 대한 반성과 .. 2020. 4. 16.
엄마 걱정 / 기형도 엄마 걱정 -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입속의 검은 잎》(1989)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가슴 아팠던 유년 시절에 대한 회고와 그에 대한 슬픔을 노래한 작품이다. 화자는 유년 시절 빈방에 앉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엄마를 기다리던 기억을 떠올리며 외롭고 두려웠던 마음을 유사한 문장의 반복과 변조를 통해 리듬감을 형성하고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이 시는 시적 화자의 어린 시절.. 2020. 4. 16.
빈집 / 기형도 빈집 -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시집 《입속의 검은 잎》(1989)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로 인한 슬픔과 공허한 마음을 노래한 시로, 사랑을 잃은 슬픔과 의미를 가졌던 모든 것과의 이별로 인해 공허해진 내면을 ‘빈집’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에서 ‘빈집’은 실연한 화자의 마음을 비유한 것이다. 사랑을 잃은 화자는 지금 글을 쓰고 있다. 이 글을 쓰는 행위는 자신이 잃은 것.. 2020. 4. 16.
떡집을 생각함 / 권혁웅 떡집을 생각함 - 권혁웅 우리 집에 없는 건 그 콩가루였네 사람들이 담장 너머로, 쑥떡 쑥떡 씹듯이 우리를 건너다보았네 우리는 얻어맞은 찹쌀처럼 차지게 손을 잡았지 개피떡에 든 소처럼 조그맣게 웅크렸지 그가 아픈 자리마다 참기름을 발라주었네 먹다 남은 막걸리와 뜨거운 물을 멥쌀에 개어 증편을 만들 때엔 우리 마음도 함께 증발했지 그래, 우리는 그렇게 그 집을 떠났지만 지금도 그 집을 생각하면 나는 백설기처럼 마음이 하얗게 되네 - 시집 《마징가 계보학》(2005) 수록 ◎시어 풀이 ·차지게 : 반죽이나 밥, 떡 따위가 끈기가 많게. ·개피떡 : 흰떡이나 쑥떡을 얇게 밀어 팥·콩의 소를 넣고 반달같이 만든 떡. ·멥쌀 : 메벼에서 나온, 끈기가 적은 쌀. ·증편 : 막걸리를 조금 탄 뜨거운 물에 멥쌀가루를.. 2020. 4. 16.
강(江) / 구광본 강(江) - 구광본 혼자서는 건널 수 없는 것오랜 날이 지나서야 알았네갈대가 눕고 다시 일어서는 세월,가을빛에 떠밀려 헤매기만 했네​한철 깃든 새들이 떠나고 나면지는 해에도 쓸쓸해지기만 하고얕은 물에도 휩싸이고 말아혼자서는 건널 수 없는 것. -시집《강》(1987)수록 ▲이해와 감상 인간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강’을 건너기 마련이다. 그 ‘강’은 인생에 있어서 겪어야 하는 고비이며 따라서 인간은 이를 극복해야 한다. 이 시의 화자는 ‘강’을 혼자서는 건널 수 없다는 깨달음과 함께 다른 누군가와 함께해야만 어떤 어려움도 쉽게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시는 4행을 한 연으로 하여 2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수미 상관의 구조와 단정적 어투를 통해.. 2020. 4. 16.
받들어 꽃 / 곽재구 받들어 꽃 - 곽재구 국군의 날 행사가 끝나고 아이들이 아파트 입구에 모여 전쟁놀이를 한다 장난감 비행기 전차 항공모함 아이들은 저희들 나이보다 많은 수의 장난감 무기들을 횡대로 늘어놓고 에잇 기관총 받아라 수류탄 받아라 미사일 받아라 끝내는 좋다 원자폭탄 받아라 무서운 줄 모르고 서로가 침략자가 되어 전쟁놀이를 한다 한참 그렇게 바라보고 서 있으니 아뿔사 힘이 센 304호실 아이가 303호실 아이의 탱크를 짓누르고 짓눌린 303호실 아이가 기관총을 들고 부동자세로 받들어 총을 한다 아이들 전쟁의 클라이막스가 받들어 총에 있음을 우리가 알지 못했듯이 아버지의 슬픔의 클라이막스가 받들어 총에 있음을 아이들은 알지 못한다 떠들면서 따라오는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과 학용품 한 아름을 골라주며 아무것도 .. 2020. 4. 15.
고향 / 곽재구 고향 - 곽재구 흐린 새벽 감나무골 오막돌집 몇 잎 치자꽃 등불 켜고 산자락에 모이고 깜장 구들 몇 장 서리 내린 송지댁네 외양간 선머슴 십 년 착한 바깥양반 콩대를 다둑이며 쇠죽을 쑤고 약수골 신새벽 꿈길을 출렁이며 송지덕 항아리에 물 붓는 소리 에헤라 나는 보지 못했네 에헤라 나는 듣지 못했네 손시려 송지택 구들 곁에 쭈그린 동안 선머슴 십 년 착한 바깥양반 생솔 부지깽이 아내에게 넘겨주고 쓱싹쓱싹 함지박이 쌀 씻는 모습 쪼륵쪼륵 양은냄비에 뜨물 받는 소리 에헤라 대학 나온 광주 양반에게서도 에헤라 유학 마친 서울 양반에게서도 나는 보지 못하였네 듣지 못하였네 - 시집 《사평역에서》(1983) ◎시어 풀이 ·오막돌집 : ‘오막’과 ‘돌집’을 합한 것. ‘오막’은 오두막의 준말, 사람이 겨우 들어가 살.. 2020. 4. 15.
전장포 아리랑 / 곽재구 전장포 아리랑- 곽재구 아리랑 전장포 앞바다에웬 눈물방울 이리 많은지각이도 송이도 지나 안마도 가면서반짝이는 반짝이는 우리나라 눈물 보았네보았네 보았네 우리나라 사랑 보았네재원도 부남도 지나 낙월도 흐르면서한 오천 년 떠밀려 이 바다에 쫓기운자그맣고 슬픈 우리나라 사랑들 보았네꼬막 껍질 속 누운 초록 하늘못나고 뒤엉긴 보리밭길 보았네보았네 보았네 멸치 덤장 산마이 그물 너머바람만 불어도 징징 울음 나고손가락만 스쳐도 울음이 배어 나올서러운 우리나라 앉은뱅이 섬들 보았네아리랑 전장포 앞바다에웬 설움 이리 많은지아리랑 아리랑 나리꽃 꺾어 섬 그늘에 띄우면서. - 출처 《사평역에서》 (1983) ◎시어 풀이 전장포 : 전남 신안군 임자도에 있는 항구 이름 / 덤장 : 물고기가 다니는 길목.. 2020. 4. 14.
20년 후의 가을 / 곽재구 20년 후의 가을 - 곽재구 내 어릴 적 산골학교 미술 시간에 나는 푸른 크레용으로 옥토끼 모양 우리나라 지도를 그려 놓고 그 안에 울긋불긋 우거진 단풍잎과 맑은 시내를 그렸었다. 산머루 향이 교실까지 날아들던 오후 사범학교를 갓 졸업한 처녀 선생님은 가을 산꽃이 지고 해으름이 일고 그 가을내 나는 선생님의 눈물방울과 같은 단풍잎과 맑은 시냇물 속에 뛰놀았지만 돌아서서 눈물 훔치던 선생의 뒷모습과 나를 쳐다보던 충혈된 눈동자를 잊을 수 없었다 그래 단풍잎은 지고 세월은 가고 이제는 선생이 된 내 앞에서 아이들이 땀을 흘리며 그림을 그린다. 똑같은 얼굴 똑같은 슬픔의 푸른 크레용으로 둘러친 동강 난 내 땅 내 그리운 하늘 아이들은 평상의 얼굴로 반쪽의 땅 위에 단풍잎을 채우고 나는 충혈된 눈으로 아이들을 .. 2020. 4. 14.
구두 한 켤레의 시(詩) / 곽재구 구두 한 켤레의 시(詩) - 곽재구 차례를 지내고 돌아온 구두 밑바닥에 고향의 저문 강물 소리가 묻어 있다. 겨울 보리 파랗게 꽂힌 강둑에서 살얼음판 몇 발자국 밟고 왔는데 쑥골 상엿집 흰 눈 속을 넘을 때도 골목 앞 보세점 흐린 불빛 아래서도 찰랑찰랑 강물 소리 들린다 내 귀는 얼어 한 소절도 듣지 못한 강물 소리를 구두 혼자 어떻게 듣고 왔을까 구두는 지금 황혼 뒤축의 꿈이 몇 번 수습되고 지난 가을 터진 가슴의 어둠 새로 누군가의 살아있는 오늘의 부끄러운 촉수가 싸리 유채 꽃잎처럼 꿈틀댄다 고향 텃밭의 허름한 꽃과 어둠과 구두는 초면 나는 구면 건성으로 겨울을 보내고 돌아온 내게 고향은 꽃잎 하나 바람 한 점 꾸려주지 않고 영하 속을 흔들리며 떠나는 내 낡은 구두가 저문 고향의 강물 소리를 들려준다.. 2020. 4. 14.
새벽 편지 / 곽재구 새벽 편지 - 곽재구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의 정령들은 잠들고 눈시울이 붉어진 인간의 혼들만 깜박이는 아무도 모르는 고요한 그 시각에 아름다움은 새벽의 창을 열고 우리들 가슴의 깊숙한 뜨거움과 만난다. 다시 고통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해야겠다. 이제 밝아올 아침의 자유로운 새소리를 듣기 위하여 따스한 햇살과 바람과 라일락 꽃향기를 맡기 위하여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한마디 새벽 편지를 쓰기 위하여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 시집 《전장포 아리랑》(1985.. 2020. 4. 14.
사평역에서 / 곽재구 사평역에서 - 곽재구 ​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2020. 4.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