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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구두 한 켤레의 시(詩) / 곽재구

by 혜강(惠江) 2020. 4. 14.

 

 

 

 

 

 

구두 한 켤레의 시(詩)

 

 

- 곽재구


 

 

차례를 지내고 돌아온
구두 밑바닥에
고향의 저문 강물 소리가 묻어 있다.
겨울 보리 파랗게 꽂힌 강둑에서
살얼음판 몇 발자국 밟고 왔는데
쑥골 상엿집 흰 눈 속을 넘을 때도
골목 앞 보세점 흐린 불빛 아래서도
찰랑찰랑 강물 소리 들린다
내 귀는 얼어
한 소절도 듣지 못한 강물 소리를
구두 혼자 어떻게 듣고 왔을까
구두는 지금 황혼
뒤축의 꿈이 몇 번 수습되고
지난 가을 터진 가슴의 어둠 새로
누군가의 살아있는 오늘의 부끄러운 촉수가
싸리 유채 꽃잎처럼 꿈틀댄다
고향 텃밭의 허름한 꽃과 어둠과
구두는 초면 나는 구면
건성으로 겨울을 보내고 돌아온 내게
고향은 꽃잎 하나 바람 한 점 꾸려주지 않고
영하 속을 흔들리며 떠나는 내 낡은 구두가
저문 고향의 강물 소리를 들려준다.
출렁출렁 아니 덜그럭덜그럭.

 

           - 시집 사평역에서(1983) 수록  

   

시어 풀이

 

촉수(觸手) : 하등 동물의 촉감기 사물에 손을 댐.

건성으로 : 성의 없이 대충 겉으로만 함.

 

 

이해와 감상

 

 

 이 시는 고향에 다녀온 뒤, 자신의 낡은 구두를 보며 정작 자기는 잊고 있던 고향의 모습을 자기의 구두가 간직하고 있음을 알고, 떠나온 고향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을 형상화항 작품이다.

 

 화자는 이미 다녀온 고향의 풍경을 나타내면서도 현재형 어미를 사용함으로써 고향의 풍경을 바로 눈앞에서 펼쳐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낡은 구두를 신고 고향을 다녀온 뒤에 화자는 고향의 모습을 구두가 묻혀 왔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고향의 모습을 출렁거리는 '강물 소리'로 떠올리고 있다.

 

 구두를 의인화하여 화자의 정서를 표현한 이 시는 성찰적 어조로 고향에 대한 내면 의식을 드러낸다. 또한, 시각과 청각 등 다양한 감각 외에 구두에 '강물 소리'가 묻어 있다는 등의 공감각적인 표현까지 사용하여 한층 다양한 이미지로 대상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고향에 다녀온 화자는 구두에 묻은 고향의 강물 소리를 듣는다. 여기서 구두는 성찰의 매개체이자 고향의 인상을 지속적으로 느끼게 하는 심리적 매개체 역할을 한다. ‘고향의 저문 강물 소리에선 두고 온 고향에 대한 화자의 그리움이 묻어 있다. ‘겨울 보리 파랗게 꽂힌 강둑은 고향의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흰 눈의이미지와 대비되며, ‘찰랑찰랑 강물 소리는 고향을 청각적 이미지로 그려낸 것이다.

 

 화자는 구두를 통해 고향을 느낀다. 구두는 뒤축을 몇 차례 수선할 정도로 낡고 벌어져 터진 가슴의 어둠 새로’‘오늘의 부끄러운 촉수가/ 사리 유채 꽃잎처럼 꿈틀댄다’. 여기서 터진 가슴이나 부끄러운 촉수는 구두와 화자의 유사성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화자 스스로에게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마지막 부분은 구두가 들려주는 저문 고향의 강물 소리가 그려진다. 퇴락해 버린 모습의 고향의 텃밭의 허름한 꽃과 어둠은 나에게는 구면이지만, 내 낡은 구두는 초면이면서도 저문 고향의 강물 소리를 들려준다‘. ’출렁출렁 아니 덜그럭덜그럭은 강물 소리를 구두 소리로 표현한 것으로서, 화자의 마음 속에 깊이 새겨진 고향의 소리를 실감 나게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곽재구의 시는 70~년대 대부분의 시가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부정과 비판을 주제로 삼아 민중이 주체가 되는 시들을 ㅆㅓ온 것과는 달리, 현실과 서정을 적절하게 결합시켰다는 점에서 당시 리얼리즘 시들과는 차이를 가진다. 이것은 곽재구 시의 서정성 때문인데, 그 서정성은 친근한 소재, 향토적이고 토속적인 것의 옹호, 자연 이미지 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작자 곽재구(郭在九, 1954 ~ )

 

 

 시인. 전남 광주 출생. 1981중앙일보신춘문예에 <사평역에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주로 향토적인 서정과 민중의 삶에 대한 애정을 애상적으로 표현한 작품을 썼다.

 

 시집으로는 사평역에서(1983), 전장포 아리랑(1985), 서울 세노야(1990), 참 맑은 물살(1995),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1999), 우리가 별과 별 사이를 여행할 때(2011), 와온 바다(2012) 등이 있다.

 

 

 

/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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