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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20년 후의 가을 / 곽재구

by 혜강(惠江) 2020. 4. 14.

 

 

 

 

 

20년 후의 가을

 

 

 

- 곽재구

 

 

 

내 어릴 적 산골학교 미술 시간에
나는 푸른 크레용으로 옥토끼 모양 우리나라
지도를 그려 놓고 그 안에 울긋불긋 우거진
단풍잎과 맑은 시내를 그렸었다.
산머루 향이 교실까지 날아들던 오후
사범학교를 갓 졸업한 처녀 선생님은
가을 산꽃이 지고 해으름이 일고
그 가을내 나는 선생님의 눈물방울과 같은
단풍잎과 맑은 시냇물 속에 뛰놀았지만
돌아서서 눈물 훔치던 선생의 뒷모습과
나를 쳐다보던 충혈된 눈동자를 잊을 수 없었다
그래 단풍잎은 지고 세월은 가고
이제는 선생이 된 내 앞에서
아이들이 땀을 흘리며 그림을 그린다.
똑같은 얼굴 똑같은 슬픔의 푸른 크레용으로
둘러친 동강 난 내 땅 내 그리운 하늘
아이들은 평상의 얼굴로
반쪽의 땅 위에 단풍잎을 채우고
나는 충혈된 눈으로 아이들을 보았다.
눈을 뜨고 모른다며 살아온 날들이 가슴 후비는 날
가만히 손가락으로 그려 보는 내 땅 내 그리운
하늘 아래 나는 이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내 손으로 그린 내 땅 안에 허름하게 시든
단풍잎 하나 떨구는 것을 거부하면서
끝내는 잊혀진 옛 선생님의 눈물마저 되살아나
동강 난 눈물방울들이 산과 바다와
아이들의 웃는 얼굴을 뒤덮었다.

 

             - 시집 전장포 아리랑(1985) 수록

 

 

시어 풀이

 

해으름 : ‘해거름의 사투리,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질 무렵. 또는 그런 때.

 

 

이해와 감상

 

 

 이 시는 분단의 현실을 슬퍼하며 이를 모른 체하고 살아왔던 자신의 지난 날들을 과거 선생님의 모습과 현재 선생이 된 자신의 모습을 겹쳐서 시상을 전개하여 분단된 조국의 상황에 대한 비애감과 현실에 대한 자기반성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회상의 방식을 통해 20년 전의 상황과 현재 상황을 대응시켜 형상화하고 있다. 화자는 20년 전, 자신의 학창 시절을 회상하면서 우리나라의 지도를 그리던 미술 시간을 떠올린다.

 

 당시 그린 그림은 분단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옥토끼모양을 그려놓고, 그 안에 단풍잎과 맑은 시내도 곁들인 가을의 풍경을 그렸었다. 그 그림을 보던 선생님은 눈물을 보이고, 화자는 그러한 선생님의 표정을 이해하지 못한 채 유년 시절을 지나왔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선생님이 된 화자는 아이들이 반쪽의 땅 위에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며 가슴 아파하며, 반쪽의 땅만 조국이라고 생각하는 요즘 아이들의 그림을 통해 모른척하며 살아온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눈을 뜨고 모른다며 살아온 날들이 가슴 후비는 날은 분단의 현실을 모른 체하고 지나온 삶에 대한 회한으로 자기 성찰(自己省察)이다. 그래서 화자는 가만히 손가락으로 그려 보는 내 땅 내 그리운 하늘’, 즉 통일된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품어 보지만, ‘나는 이제 무엇을 채울 것인가라며, 분단된 현실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無力感)을 드러낸다. 그래서 화자는 분단 상황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아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분단된 국가를 그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분단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을 드러낸 작품으로, 분단이라는 문제를 일상생활과 관련된 장면을 통해 그려 냄으로써 시에 대한 공감을 높이고 사실성을 강화하고 있다. 특히 분단된 현실을 외면하고 살아온 자신에 대한 반성적 시각이 읽는 이들에게 공감을 자아내는 작품이다. 비유와 상징을 통해 분단의 현실을 시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 또한 특징적이다.

 

 

작자 곽재구(郭在九, 1954 ~ )

 

 

 시인. 전남 광주 출생. 1981중앙일보신춘문예에 <사평역에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주로 향토적인 서정과 민중의 삶에 대한 애정을 애상적으로 표현한 작품을 썼다 시집으로는 사평역에서(1983), 전장포 아리랑(1985), 서울 세노야(1990), 참 맑은 물살(1995),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1999), 우리가 별과 별 사이를 여행할 때(2011), 와온 바다(2012) 등이 있다.

 

 

 

/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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