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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사평역에서 / 곽재구

by 혜강(惠江) 2020. 4. 13.

 

 

 

<출처 : 다음 블로그 '달팽이의 꿈'>

 

 

 

사평역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          - 중앙일보(1981) 신춘문예 당선작

 

 

시어 풀이

 

송이눈 : ‘함박눈의 옛말. 굵고 탐스럽게 내리는 눈.
두름 : 물고기를 짚으로 한 줄에 열 마리씩 두 줄로 엮은 것.

설원 : 눈이 덮인 벌판.
호명 : 이름을 부름. 여기서는 생각이나 기억을 떠올린다는 의미로 쓰임.

 

 

이해와 감상

 

 

 이 시는 1981중앙일보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신춘문예 사상 가장 빼어난 서정시라고 평가받을 만큼 유명하다. ‘사평역이라는 시골의 간이역을 배경으로 하여 고향으로 가는 막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추억과 회한을 간결하면서도 잔잔하게 그리고 있다.

 

 이 시는 오지 않는 막차를 기다리는 쓸쓸한 기차역 대합실의 정경을 통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단한 삶과 추억, 아픔을 함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작품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사평역은 시인의 고향 부근 간이역을 모델로 빌리긴 했어도 순전히 가상의 공간이다. 먼저 이 작품은 사평역 대합실의 풍경을 묘사한다. 대합실은 열차를 기다기 위해 사람들이 잠시 머무는 공간이다. 이 작품에서는 삶의 애환에 젖은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삶을 위로해 주는 공간으로 제시되어 있다. 기다리는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고, 대합실 밖에는 눈이 쌓이고, 차가운 유리창에 톱밥 난로가 지펴져 있다. 기다리는 사람 중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거린다. 화자는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한 줌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준다. ‘한 줌 톱밥을 던져 주위의 공기를 따뜻하게 덥히는 행위는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동류 의식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대합실 사람들은 지친 탓인지 모두 무거운 삶의 무게에 침묵하고 있다. 오래 앓는 기침 소리’, ‘쓴 약 같은 담배 연기는 힘겨운 삶에 찌든 서민들의 모습이다. 이들은 싸륵싸륵 내린 눈꽃에 위로를 받고, 홀로 된 개인이 아니라 함께하는 대상으로 인식하며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본다. ‘눈꽃의 화음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눈 내리는 창밖의 풍경을 공감각적으로 표현하여, 삶의 애환을 감내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은 고단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슬픔이 그려져 있다. '삶이란 기차를 타고 설원을 달리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낯설고 고통스런 세상을 설원에, 그 속을 쓸쓸히 달리는 기차는 힘겹고 고달픈 우리의 인생 역정을 비유한 것이다. 그런 삶을 지탱하며 살아가는 나약한 사람들과 이를 지켜보는 화자 역시 결국은 같은 존재이다. 이 시에서 인생은 누구에게나 힘들고 고달픈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라는 표현을 통해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드러내며, 이들을 공감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작자 곽재구(郭在九, 1954 ~ )

 

 

 시인. 전남 광주 출생. 1981중앙일보신춘문예에 <사평역에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주로 민중의 삶에 대한 애정을 애상적으로 표현한 작품을 썼다. 시집으로는 사평역에서(1983), 전장포 아리랑(1985), 서울 세노야(1990), 참 맑은 물살(1995),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1999), 우리가 별과 별 사이를 여행할 때(2011), 와온 바다(2012) 등이 있다.

 

 

 

/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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