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종(晩鐘)
-고창환
호박엿 파는 젊은 부부
외진 길가에 손수레 세워놓고
열심히 호박엿 자른다
사는 사람 아무도 없는데
어쩌자고 자꾸 잘라내는 것일까
그을린 사내 얼굴
타다 만 저 들판 닮았다
한솥 가득 끓어올랐을 엿빛으로
어린 아내의 볼 달아오른다
잘려 나간 엿처럼 지나간 세월
끈적거리며 달라붙는다
그들이 꿈꿔 왔을
호박엿보다 단단한 삶의 조각들
삐걱이는 손수레 위 수북이 쌓인다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는데
그들이 잘라내는 적막한 꿈들
챙강대는 가위 소리
저녁 공기 틈새로 둥글게 퍼진다
- 시집《발자국들이 남긴 길》(2000) 수록
◎시어 풀이
만종(晩鐘) : 저녁 때 절이나 교회 따위에서 치는 종.
챙강대는 : ‘챙가당대는’의 준말. 얇은 쇠붙이나 유리, 사기 따위가 자꾸 부딪치거나 바스러지며 잇따라 맑게 울리는 소리가 나는.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제목 그대로 프랑스 화가 밀레의 ‘만종(晩鐘)’을 연상케 한다. 만종은 황혼 녘 부부로 보이는 한 남자와 여자가 종소리에 맞춰 삼종기도를 드리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밀레가 <만종>을 그리게 된 동기는 옛날에 할머니가 들에서 일하다가도 종이 울리면 일을 멈추고 죽은 가엾은 이들을 위해 삼종기도 드린 것을 생각하며 그 장면을 화폭에 단았다고 한다. 우리가 이 그림에서 감동하는 까닭은, 밀레가 말했던 ‘기도의 진정성’이 이 그림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도의 진정성’이란 고단한 삶 속에서 소박한 꿈을 꾸며 사는 모습일 것이다.
이 시는 해질 무렵, 오가는 이 없는 외로운 길가에서 호박엿을 파는 젊은 부부가 ‘사는 사람 아무도 없는데’ 자꾸 호박엿을 자르는 모습을 연민으로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면서 고단한 삶 속에 담긴 젊은 부부의 소박한 꿈을 차분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이 시의 감동은 ‘사는 사람 아무도 없는데/ 어쩌자고 자꾸 잘라내는 것일까’라는 문장에서 화자의 걱정 가득한 마음이 묻어나면서 시작된다. 잘라 논 호박엿은 계속 쌓이고 지나가는 사람은 없다. 저 호박엿을 다 팔지 못하면, 어찌 될까?
걱정이 가득한 화자의 시선이 황혼에 비친 부부의 얼굴로 옮겨간다. ‘그을린 사내 얼굴’이 저녁 노을빛에 ‘타다 만 저 들판’을 닮았고, ‘어린 아내의 볼’이 ‘한솥 가득 끓어 올랐을 엿빛’으로 보인다. 감각적인 묘사가 일품이다. ‘잘려 나간 엿처럼 지나간 세월/ 끈적거리며 달라 붙는다’는 것은 팍팍하고 힘겨운 세월을 살았을 부부의 지난 삶을 촉각적 심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삶의 조각들은 ‘그들이 꿈꿔 왔을/ 호박엿보다 단단한’ 것이라며 그 조각 속에 꿈이 담겨 있으며, 비록 ‘삐걱이는 손수레’이지만 꿈 조각들이 ‘삐걱이는 손수레 위 수북이 쌓인다’고 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화자의 눈에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어’ 비록 ‘적막한 꿈’처럼 보이지만, ‘ 챙강대는 가위 소리/ 저녁 공기 틈새로 둥글게 퍼진다’라고 표현함으로써 둥글게 퍼지는 가위 소리처럼 엿장수 부부가 품은 행복한 삶에 대한 소망이 드러나게 된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이 시는 비유를 사용하여 젊은 부부의 삶의 모습을 감각적으로 그려내고, 관념적인 대상을 촉각적 심상으로 형상화하고 공감각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소박한 삶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이라 할 것이다.
►시인 고창환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나 인천대 국문과와 인하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오월>이 당선되면서 시단에 등장했다. 시집 《발자국들이 남긴 길》(2000)
/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문학관련 > - 읽고 싶은 시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벽 편지 / 곽재구 (0) | 2020.04.14 |
---|---|
사평역에서 / 곽재구 (0) | 2020.04.13 |
별국 / 공광규 (0) | 2020.04.13 |
고백 - 편지 6 / 고정희 (0) | 2020.04.13 |
우리 동네 구자명 씨 / 고정희 (0) | 2020.04.1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