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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우리 동네 구자명 씨 / 고정희

by 혜강(惠江) 2020. 4. 13.

 

 

<출처 : 다음블로그 '빨간 장미'>

 

 

 

우리 동네 구자명 씨

 

 

- 고정희

 

 

 

맞벌이 부부 우리 동네 구자명 씨

일곱 달 아기 엄마 구자명 씨는

출근 버스에 오르기가 무섭게

아침 햇살 속에서 졸기 시작한다.

경기도 안산에서 서울 여의도까지

경적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옆으로 앞으로 꾸벅꾸벅 존다.

 

차창 밖으론 사계절이 흐르고

진달래 피고 밤꽃 흐드러져도 꼭

부처님처럼 졸고 있는 구자명 씨.

그래 저 십 분은

간밤 아기에게 젖 물린 시간이고

또 저 십 분은

간밤 시어머니 약 시중 든 시간이고

그래그래 저 십 분은

새벽녘 만취해서 돌아온 남편을 위하여 버린 시간일 거야.

 

고단한 하루의 시작과 끝에서

잠 속에 흔들리는 팬지꽃 아픔

식탁에 놓인 안개꽃 멍에

그러나 부엌문이 여닫기는 지붕마다

여자가 받쳐 든 한 식구의 안식이

아무도 모르게

죽음의 잠을 향하여

거부의 화살을 당기고 있다.

 

            - 시집 지리산의 봄(1987) 수록

 

 

시어 풀이

 

팬지꽃 : 제비꽃과의 풀. 4~5월에 자주색, 흰색, 노란색의 꽃이 핀다.
안개꽃 : 석죽과의 한해살이풀. 5~6월에 잘고 흰 꽃이 무리를 지어 핀다.
멍에 :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구속이나 억압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이해와 감상

 

 

  구자명 씨의 출근 모습을 화자가 지켜보는 방식으로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 구자명 씨가 버스 안에서 졸고 있는 모습을 바탕으로 구자명 씨의 고달픈 일과를 상상해 보며 여성의 고단한 삶을 드러내고 여성의 일방적 희생을 강요당하는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이 시는 직장 일가사라는 이중고(二重苦)에 시달리는 현대 사회 여성의 삶을 구자명 씨를 내세워 진솔하게 다루고 있는 작품으로, 유사한 통사 구조의 반복과 비유적인 표현으로 대상의 고단한 일상을 열거하고, 개인의 모습에서 보편적인 모습으로 확장하면서 주제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1연은 출근 버스에서 계속 졸고 있는 구자명 씨가 소개된다. ‘일곱 살 된 아기엄마 구자명 씨버스에 오르기가 무섭게먼 거리를 경적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존다.’는 표현으로 고단한 생활을 한다.

 

 2연은 구자명 씨의 고단한 삶의 실상이 열거된다. 마치 부처님처럼 졸고 있는 구자명 씨는 주변의 변화나 게절의 변화 따위는 인식하지 못하고 아기와 병든 시어머니, 그리고 새벽녘 만취해서 돌아온 남편을 기다리는 등 가족을 위해 일하느라 피곤한 삶을 살아간다. 이러한 구자명 씨의 고달픈 일과는 자식에게는 현모’, 시어머니에게는 효부’, 남편에게는 양처라는 보이지 않는 사회적 관념에 의해 여성의 일방적인 희생이 강요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3연은 여자의 희생으로 가정의 안식과 평안이 이루어짐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구자명 씨의 아픔을 상징하는 팬지꽃 아픔’, ‘안개꽃 멍에는 기실 여성의 희생을 형상화한 구절로, ‘팬지꽃안개꽃으로 상징되는 가정의 우아함과 편안함이 모두 여성의 희생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죽음의 잠을 향하여/ 거부의 화살을 당기고 있다는 표현은 '죽음과 같은 잠', 즉 피곤함이 죽음처럼 삶을 갉아 먹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거부의 화살을 당김으로써 여성의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는 현대 사회에 대한 화자의 비판적 인식을 나타낸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시적 화자는 졸고 있는 구자명 씨를 관찰하다가 가정에 돌아간 구자명 씨가 아기와 시어머니, 남편의 시중을 드느라 제대로 쉬지 못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며 연민에 가득 찬 어조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와 같은 어조의 변화를 통해 가족들을 위해 희생하는 구자명 씨의 삶에 연민의 정서를 유발하면서, 이러헌 희생을 구자명 씨 개인의 일상에 국한하지 않고, 여성의 고달픈 삶을 통하여 보편적인 한국 사회 여성으로 확대하여 시상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즉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 희생을 강요하는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작자 고정희(高靜熙, 1948~1991)

 

 

 전남 해남 출생. 본명 고성애. 1975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1983년 대한민국 시인상 수상시집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1979), 실락원 기행(1981), 초혼제(1983), 이 시대의 아벨(1983), 눈물꽃(1986), 지리산의 봄(1987) 등의 시를 통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쉽게 절망하지 않는 강한 의지와 함께 생명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노래했다. 그러나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전통적인 남도가락과 씻김굿 형식을 빌려 민중의 아픔을 드러내고 위로하는 장시를 잇달아 발표했다. 이 당시의 시집으로는 저 무덤 위의 푸른 잔디(1989) 여성해방출사표(1990), 광주의 눈물비(1990), 아름다운 사람 하나(1990) 등이 있다.

 자신의 시의 모체가 되어온 지리산 등반 도중 실족으로 사망했다. 유고 시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1992)가 있다.

 

 

 

/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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