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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만종(晩鐘) / 고창환

by 혜강(惠江) 2020. 4. 13.

 

 

 

 

 

만종(晩鐘)

 

 

-고창환

 

  

 

호박엿 파는 젊은 부부

외진 길가에 손수레 세워놓고

열심히 호박엿 자른다

사는 사람 아무도 없는데

어쩌자고 자꾸 잘라내는 것일까

그을린 사내 얼굴

타다 만 저 들판 닮았다

한솥 가득 끓어올랐을 엿빛으로

어린 아내의 볼 달아오른다

잘려 나간 엿처럼 지나간 세월

끈적거리며 달라붙는다

그들이 꿈꿔 왔을

호박엿보다 단단한 삶의 조각들

삐걱이는 손수레 위 수북이 쌓인다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는데

그들이 잘라내는 적막한 꿈들

챙강대는 가위 소리

저녁 공기 틈새로 둥글게 퍼진다

 

 

 

       - 시집발자국들이 남긴 길(2000) 수록

 

 

시어 풀이

 

만종(晩鐘) : 저녁 때 절이나 교회 따위에서 치는 종.

챙강대는 : ‘챙가당대는의 준말. 얇은 쇠붙이나 유리, 사기 따위가 자꾸 부딪치거나 바스러지며 잇따라 맑게 울리는 소리가 나는.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제목 그대로 프랑스 화가 밀레의 만종(晩鐘)’을 연상케 한다. 만종은 황혼 녘 부부로 보이는 한 남자와 여자가 종소리에 맞춰 삼종기도를 드리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밀레가 <만종>을 그리게 된 동기는 옛날에 할머니가 들에서 일하다가도 종이 울리면 일을 멈추고 죽은 가엾은 이들을 위해 삼종기도 드린 것을 생각하며 그 장면을 화폭에 단았다고 한다. 우리가 이 그림에서 감동하는 까닭은, 밀레가 말했던 기도의 진정성이 이 그림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도의 진정성이란 고단한 삶 속에서 소박한 꿈을 꾸며 사는 모습일 것이다.

  이 시는 해질 무렵, 오가는 이 없는 외로운 길가에서 호박엿을 파는 젊은 부부가 사는 사람 아무도 없는데자꾸 호박엿을 자르는 모습을 연민으로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면서 고단한 삶 속에 담긴 젊은 부부의 소박한 꿈을 차분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이 시의 감동은 사는 사람 아무도 없는데/ 어쩌자고 자꾸 잘라내는 것일까라는 문장에서 화자의 걱정 가득한 마음이 묻어나면서 시작된다. 잘라 논 호박엿은 계속 쌓이고 지나가는 사람은 없다. 저 호박엿을 다 팔지 못하면, 어찌 될까?

 

 걱정이 가득한 화자의 시선이 황혼에 비친 부부의 얼굴로 옮겨간다. ‘그을린 사내 얼굴이 저녁 노을빛에 타다 만 저 들판을 닮았고, ‘어린 아내의 볼한솥 가득 끓어 올랐을 엿빛으로 보인다. 감각적인 묘사가 일품이다. ‘잘려 나간 엿처럼 지나간 세월/ 끈적거리며 달라 붙는다는 것은 팍팍하고 힘겨운 세월을 살았을 부부의 지난 삶을 촉각적 심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삶의 조각들은 그들이 꿈꿔 왔을/ 호박엿보다 단단한것이라며 그 조각 속에 꿈이 담겨 있으며, 비록 삐걱이는 손수레이지만 꿈 조각들이 삐걱이는 손수레 위 수북이 쌓인다고 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화자의 눈에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어비록 적막한 꿈처럼 보이지만, ‘ 챙강대는 가위 소리/ 저녁 공기 틈새로 둥글게 퍼진다라고 표현함으로써 둥글게 퍼지는 가위 소리처럼 엿장수 부부가 품은 행복한 삶에 대한 소망이 드러나게 된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이 시는 비유를 사용하여 젊은 부부의 삶의 모습을 감각적으로 그려내고, 관념적인 대상을 촉각적 심상으로 형상화하고 공감각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소박한 삶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이라 할 것이다.

 

 

시인 고창환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나 인천대 국문과와 인하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오월>이 당선되면서 시단에 등장했다. 시집 발자국들이 남긴 길(2000)

 

 

 

/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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