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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홀린 사람 / 기형도

by 혜강(惠江) 2020. 4. 17.

 

 

 

 

 

 

홀린 사람

 

기형도

 

 

사회자가 외쳤다
여기 일생 동안 이웃을 위해 산 분이 계시다
이웃의 슬픔은 이분의 슬픔이었고
이분의 슬픔은 이글거리는 빛이었다
사회자는 하늘을 걸고 맹세했다
이분은 자신을 위해 푸성귀 하나 심지 않았다
눈물 한 방울도 자신을 위해 흘리지 않았다
사회자는 흐느꼈다
보라, 이분은 당신들을 위해 청춘을 버렸다
당신들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
그분은 일어서서 흐느끼는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분에게 박수를 쳤다
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들은 실신했다
그때 누군가 그분에게 물었다, 당신은 신인가
그분은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유령인가, 목소리가 물었다
저 미치광이를 끌어내, 사회자가 소리쳤다
사내들은 달려갔고 분노한 여인들은 날뛰었다
그분은 성난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분에게 박수를 쳤다
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은 실신했다
그분의 답변은 군중들의 아우성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 시집 입속의 검은 잎(1989)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선동가를 통해 대중을 기만하는 지배자와 이성적 비판 능력을 상실한 채 맹목적 추종으로 지배자에게 기만당하는 어리석은 대중의 모습을 우화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시는 교활한 권력자인 '그 분'이 선동가를 동원하여 우매한 군중들을 어떻게 기만하는가를 우화적 형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선 권력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오직 선동가를 통하여 자신을 찬양하게 한다.

 

 이 시에는 등장하는 인물은 사회자그분(이분)’ 그리고 군중들과 군중들 사이에 낀 누군가의 네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사회자는 권력의 하수인으로, 군중들 앞에서 기만적인 권력자인 그분(이분)’을 칭찬하고 찬양하고 있다. 이때 우매한 대중인 군중들은 사회자의 말만 듣고 그분(이분)’에게 박수를 보내고 감동한다. 그런데 군중 사이에 있던 누군가(목소리)’그분에게 당신은 신인가, 유령인가묻는다. 이 사람은 그분에게 비판을 제기한다. 이 목소리를 들은 사회자는 누군가에게 미치광이 취급을 당하고 군중들로부터는 분노의 대상이 된다.

 

 이런 관계를 염두에 두고 시를 다시 읽어 본다. 선동가인 사회자는 극적인 어휘를 동원하며 그분의 희생적이고 희생적인 삶을 찬양한다. 심지어 하늘을 걸고 맹세하거나 감동하여 흐느끼는 척 연기를 하고, 심지어는 당신들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라고 군중을 선동한다. 이러한 극적 상황에서 권력자는 자신에 대한 사회자의 찬양을 제지한다. 하지만, 이것은 겸손한 이미지를 가장한 의도적인 행위이다. 이러한 기만에 대중들은 비판적인 의식을 갖지 못한 채 울먹이고 실신까지 하며 맹목적으로 환호할 뿐이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로 대표되는 사람이 완벽한 듯 보이는 그분에게 '()'인가 묻고, 실체를 보이지 않는 그분에게 '유령(幽靈)'인가 묻고 있다. 신처럼 전지전능한 사람은 없으며 유령처럼 실체가 없는 사람도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그분의 진실한 실체가 무엇인지 묻고 있다. 이 속에서 화자는 모든 대중이 어리석은 것은 아니며, 군중 속에는 비판의식을 지닌 깨어있는 자가 있다는 점을 말해 준다.

 

 하지만 그의 합리적인 비판은 '미치광이'로 낙인찍히며 사회자와 군중들에 의해 제재당한다. 이때에도 그분은 사회자를 제지하는 척하고, ‘군중들은 그에게 박수치며 환호한다. 물론 그분의 답변이 필요하지 않은 군중들의 아우성 때문에 그분의 대답은 들을 수가 없다.

 

 물론 이러한 상황은 시인이 직접 관찰한 것이 아니라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 낸 상황이다. 하지만 권력자에 의한 대중의 기만, 우매한 대중의 맹목적인 믿음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존재해 온 일이다. 따라서 시인은 권력자의 기만적인 통치 방식과 이에 현혹된 대중들에 대한 비판의식을 우회적인 방법으로 풍자하고 있다.

 

 그러면 이 시의 화자가 제시하는 제목의 홀린 사람은 누구인가? '홀리다'는 말은 대상을 유혹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한다는 뜻도 있지만, 유혹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는 뜻도 있다. 우선 전자의 뜻으로 살펴보면 홀린 사람은 그분사회자이다. 후자의 뜻으로 살펴보면 홀린 사람은 군중들이다. 그러나 사회자군중과 마찬가지로 그분에게 홀린 사람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홀린 사람은 이중적인 뜻을 지닌 것으로 볼 수 있다.

 

 

작자 기형도(奇亨度, 1960~1989)

 

 시인. 인천 옹진 출생. 1985동아일보신춘문예에 <안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1989년 서울 종로의 심야극장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함으로써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유고 시집으로 입속의 검은 잎(1989)이 있다.

 

 그의 시는 자신의 개인적인 상처를 드러내고 분석하는 데서 시작된다. 가난한 집안 환경과 아픈 아버지, 장사하는 어머니, 직장을 다니는 누이 등 어두웠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그의 시의 원체험을 형성하고 있다. , 그의 시는 우울과 비관으로 점철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개인적인 체험 외에 정치 사회적인 억압이 간접적인 원인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은 극히 비관적이며 어떠한 전망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다.

 

 

/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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