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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멸치 / 김기택

by 혜강(惠江) 2020. 4. 21.

 

 

 

 

멸치 
 

 

김기택


굳어지기 전까지 저 딱딱한 것들은 물결이었다
파도와 해일이 쉬고 있는 바닷속
지느러미의 물결 사이에 끼어
유유히 흘러다니던 무수한 갈래의 길이었다
그물이 물결 속에서 멸치들을 떼어냈던 것이다
햇빛의 꼿꼿한 직선들 틈에 끼이자마자
부드러운 물결은 팔딱거리다 길을 잃었을 것이다
바람과 햇볕이 달라붙어 물기를 빨아들이는 동안
바다의 무늬는 뼈다귀처럼 남아
멸치의 등과 지느러미 위에서 딱딱하게 굳어갔던 것이다
모래더미처럼 길거리에 쌓이고
건어물집의 푸석한 공기에 풀리다가
기름에 튀겨지고 접시에 담겨졌던 것이다
지금 젓가락 끝에 깍두기처럼 딱딱하게 잡히는 이 멸치에는
바다가 있다 그 바다에는 아직도
지느러미가 있고 지느러미를 흔드는 물결이 있다
이 작은 물결이
지금도 멸치의 몸통을 뒤틀고 있는 이 작은 무늬가
파도를 만들고 해일을 부르고
고깃배를 부수고 그물을 찢었던 것이다.

 

         - 시집 바늘구멍 속의 폭풍(1994) 수록  

 

시어풀이

*해일(海溢) : 지진이나 화산의 폭발, 해상의 폭풍 등으로 바다에 큰 물결이 갑자기 일어나 육지로 넘쳐 오르는 일.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식탁 위 반찬으로 올라온 멸치가 가졌던 생명력을 상상해 봄으로써 역동적인 생명력의 회복에 대한 염원을 드러내고 있다.

 이 시의 화자는 밥상에 올라온 멸치볶음을 보고, 팔닥이던 멸치가 금물에 잡혀 밥상에 올라오기까지의 과정을 통해, 인간 문명에 의해 생명력을 잃어가는 멸치의 비애를 보여 주면서 멸치가 본래 지녔던 강인한 생명력의 회복을 염원하고 있다. 특히, 이 시는 촉각적, 시각적 이미지를 통하여 멸치의 생명력을 선명하게 보여 주고, 대립적인 시어를 통해 주제 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단정적인 어조로 주제를 강조하고 있다.

 연구분이 되지 않은 이 시는 내용상 내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4행에서는 멸치가 본래 가졌던 생명력을 드러내고 있다. 멸치가 딱딱한 멸치볶음으로 밥상에 오르기 전에는 바다의 흐름과 하나가 되어 자유롭게 유영하는 생명력을 지닌 존재였음을 발견하고 있다.

 5~13행에서는 인간에 의해 생명력을 상실해가는 멸치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 바다의 물결과 분리되지 않고 한 몸처럼 움직이던 멸치는 인간이 던진 그물에 잡혀 생명력을 잃고 바다의 무늬는 뼈다귀처럼 남아’ ‘딱딱하게 굳어져건어물집을 거쳐, 결국, ‘기름에 튀겨지고 접시에 담겨지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화자는 인간에 의해 생명력을 잃어가는 멸치의 비애를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화자는 14~17행에서 이미 딱딱해져 접시에 담긴 멸치에 아직 바다가 있고, ‘지느러미를 흔드는 물결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 화자는 생명력의 상실이라는 부정적 인식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어 18~21행에서는 화자는 그 작은 물결멸치의 몸통을 뒤틀고그래서 파도를 만들고 해일을 부르고, 고깃배를 부수고 그물을 찢으며 저항하는 역동적인 생명력이 아직 멸치에 있음을 환기한다. 이 환기는 상실된 생명력의 회복에 대한 화자의 의지와 염원을 강렬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이 시는 접시에 담긴 멸치에서 바다의 생명력을 떠올리는 탁월한 시적 상상력을 보여 주고, 특히, 생명력을 기준으로 상반된 이미지를 주는 시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자연의 건강한 힘을 파괴하는 인간의 삶의 방식을 반성하고, 상실된 생명력을 회복하고자 하는 주제 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면, 파도, 해일, 물결에서는 부드러움과 자연의 건강한 이미지를 느낄 수 있고, ‘뼈다귀, 뻣뻣한 공기에서는 딱딱함과 죽음, 인공적인 이미지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물, 햇빛, 고깃배바다의 생명력을 위협하는 소재로 사용되었다.

 

 

작자 김기택(金基澤, 1957 ~ ) 

 

 시인. 경기 안양 출생. 1989한국일보신춘문예에 <가뭄><꼽추>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일상과 사물을 깊이 있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이를 특유의 묘사와 비유를 사용하여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시집으로 태아의 잠(1991), 바늘구멍 속의 폭풍(1994), 사무원(1999), (200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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