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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바퀴벌레는 진화 중 / 김기택

by 혜강(惠江) 2020. 4. 21.





바퀴벌레는 진화 중

 


- 김기택

 

 

믿을 수 없다, 저것들도 먼지와 수분으로 된 사람 같은 생물이란 것을.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시멘트와 살충제 속에서만 살면서도 저렇게 비대해질 수 있단 말인가. 살덩이를 녹이는 살충제를 어떻게 가는 혈관으로 흘려보내며 딱딱하고 거친 시멘트를 똥으로 바꿀 수 있단 말인가. 입을 벌릴 수밖엔 없다, 쇳덩이의 근육에서나 보이는 저 고감도의 민첩성과 기동력 앞에서는.

 

사람들이 최초로 시멘트를 만들고 집을 짓고 살기 전, 많은 벌레들을 씨까지 일시에 죽이는 독약을 만들어 뿌리기 전, 저것들은 어디에 살고 있었을까. 흙과 나무, 내와 강, 그 어디에 숨어서 흙이 시멘트가 되고 다시 집이 되기를, 물이 살충제가 되고 다시 먹이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빙하기, 그 세월의 두꺼운 얼음 속 어디에 수만 년 썩지 않을 금속의 씨를 감추고 가지고 있었을까.

 

로보트처럼, 정말로 철판을 온몸에 두른 벌레들이 나올지 몰라. 금속과 금속 사이를 뚫고 들어가 살면서 철판을 왕성하게 소화시키고 수억 톤의 중금속 폐기물을 배설하면서 불쑥불쑥 자라는 잘 진화된 신형 바퀴벌레가 나올지 몰라. 보이지 않는 빙하기, 그 두껍고 차가운 강철의 살결 속에 씨를 감추어둔 채 때가 이르기를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아직은 암회색 스모그가 그래도 맑고 희고, 폐수가 너무 깨끗한 까닭에 숨을 쉴 수 없어 움직이지 못하고 눈만 뜬 채 잠들어 있는지 몰라.

 

                             - 시집 태아의 잠(1991) 수록 


시어 풀이

*빙하기 : 지구 역사에서 빙하의 영향을 오랫동안 받았던 기간. w 존재하는 식생에 크게 영향을 미친 빙하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15,000년 전에 끝난 뷰름(Würm)빙기.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바퀴벌레를 환경오염을 극복하고 살아남은 놀라운 생명력을 지닌 존재로 파악하고, 그 바퀴벌레를 통하여 현대의 인간 문명이 지닌 비인간성과 환경오염에 무감각해진 현실을 반어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바퀴벌레는 환경오염을 극복하고 살아남은 놀라운 생명력을 가진 존재로서, 바퀴벌레가 진화한다는 것은 그만큼 환경이 더욱 심각하게 오염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화자는 진화된 바퀴벌레의 출현을 우려하면서 현재 환경의 상태를 아직은 깨끗하다고 반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3연으로 된 이 시는 연마다 비슷한 어미를 사용하여 운율을 느끼게 하고, 도치법과 영탄법을 활용하여 화지의 정서를 드러내고, 반어적 표현을 통해 주제 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이 시의 도입부인 1연은 현재의 시점에서 바퀴벌레의 놀라운 생명력에 경탄하고 있다. 도치법을 사용하고, 시적 대상을 저것이란 대명사를 제시하여 독자의 호기심을 유발하고 있다. ‘시멘트와 살충제는 환경오염을 상징하는 것으로, 시멘트를 으로 만들고, 살충제를 혈관으로 흘려보내면서도 용케 살아 남아 고감도의 민첩성과 기동력을 발휘하는 바퀴벌레야말로 환경의 변화에 대한 적응력과 생존력이 매우 뛰어난 생물체라는 것이다. 화자는 바퀴벌레에서 받은 놀라움과 충격을 영탄적 어조를 통해 우려하는 목소리로 표현하고 있다.

 

 2연에서는 문명이 발달하기 이전, 즉 환경오염 이전에 바퀴벌레의 생존에 대한 궁금증을 제기하고 있다. ‘흙과 나무, 내와 강, 그 어디에 숨어서 흙이 시멘트가 되고 다시 집이 되기를, 물이 살충제가 되고 다시 먹이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까라는 표현은 현대 문명의 발달로 환경이 오염되고 생태계가 파괴되는 과정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러한 원인으로 바퀴벌레가 생존하고 진화하였음을 보여 주려는 화자의 의도가 담긴 것이다.

 

 3연에서는 바퀴벌레의 진화 가능성, 즉 더욱 심각해질 환경오염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내고 있다. 화자는 로보트처럼’ ‘철판을 온몸에 두른 벌레’, ‘수억 톤의 중금속 폐기물을 배설하면서 불쑥불쑥 자라는 신형 바퀴벌레가 나올 것을 경고한다. 그리고 아직은 암회색 스모그가 그래도 맑고 희고, 폐수가 너무 깨끗한 까닭에라는 반어적 표현을 사용하여 미래에 더욱 심각해질 환경오염을 비판하고 있다. 이는 미래환경에 대한 암울한 전망을 제시함으로써 현재의 심각성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2019, 지금 우리는 코로나19’ 라는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지구 곳곳에서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아직 확실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니, 그 감염 경로로 볼 때 오염된 환경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앞으로 신종 바이러스의 확산을 경고하고 나섰다. 환경오염이 인간이 만들어 낸 산물이듯이, ‘바퀴벌레역시 환경오염의 산물이다. 이러한 바퀴벌레가 진화할 때 앞으로 어떤 위험이 닥쳐올지 모른다. 현대 물질문명에서 비롯한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작자 김기택(金基澤, 1957 ~ )

 

 시인. 경기 안양 출생. 1989한국일보신춘문예에 <가뭄><꼽추>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일상과 사물을 깊이 있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이를 특유의 묘사와 비유를 사용하여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시집으로 태아의 잠(1991), 바늘구멍 속의 폭풍(1994), 사무원(1999), (200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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