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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사무원 / 김기택

by 혜강(惠江) 2020. 4. 22.





사무원

 

- 김기택

 

 

이른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그는 의자 고행을 했다고 한다.

제일 먼저 출근하여 제일 늦게 퇴근할 때까지

그는 자기 책상 자기 의자에만 앉아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서 있는 모습을 여간해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점심시간에도 의자에 단단히 붙박혀

보리밥과 김치가 든 도시락으로 공양을 마쳤다고 한다.

그가 화장실 가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했다는 사람에 의하면

놀랍게도 그의 다리는 의자가 직립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는 하루 종일 손익관리대장경과 자금수지심경 속의 숫자를 읊으며

철저히 고행업무 속에만 은둔하였다고 한다.

종소리 북소리 목탁소리로 전화벨이 울리면

수화기에다 자금현황 매출원가 영업이익 재고자산 부실채권 등등을

청아하고 구성지게 염불했다고 한다.

끝없는 수행정진으로 머리는 점점 빠지고 배는 부풀고

커다란 머리와 몸집에 비해 팔다리는 턱없이 가늘어졌으며

오랜 음지의 수행으로 얼굴은 창백해졌지만

그는 매일 상사에게 굽실굽실 108배를 올렸다고 한다.

수행에 너무 지극하게 정진한 나머지

전화를 걸다가 전화기 버튼 대신 계산기를 누르기도 했으며

귀가하다가 지하철 개찰구에 승차권 대신 열쇠를 밀어 넣었다고 한다.

이미 습관이 모든 행동과 사고를 대신할 만큼

깊은 경지에 들어갔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30년간의 장좌불립(長座不立)'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리 부르든 말든 그는 전혀 상관치 않고 묵언으로 일관했으며

다만 혹독하다면 혹독한 이 수행을

외부 압력에 의해 끝까지 마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나마 지금껏 매달릴 수 있다는 것을 큰 행운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의 통장으로는 매달 적은 대로 시주가 들어왔고

시주는 채워지기 무섭게 속가의 살림에 흔적 없이 스며들었으나

혹시 남는지 역시 모자라는지 한 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한다.

오로지 의자 고행에만 더욱 용맹정진했다고 한다.

그의 책상 아래에는 여전히 다리가 여섯이었고

둘은 그의 다리 넷은 의자 다리였지만

어느 둘이 그의 다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

 

             - 시집 사무원(1999) 수록

 

 

시어풀이

*고행 : 몸으로 견디기 어려운 일들을 통해 수행을 쌓는 일.

*붙박혀 : 한 곳에 자리 잡고 꼼짝하지 않고

*: ①부처나 웃어른에게 음식을 대접함. 절에서 음식을 먹는 일.

*은둔 : 세상일을 피해 숨음.

*장좌불립(長座不立) : 일어나지 않고 오래 앉아 있음

*속가 :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의 집. 승려가 되기 전에 태어난 집.

*시주 : 승려나 절에 물건을 베풀어 주는 사람. 또는 그런 일. 화주(化主).

*용맹정진 : 용맹스럽게 힘써 나아감. 용맹스럽게 불도를 수행함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하루 종일 업무에 시달리는 사무원의 모습을 불교 수행자의 고행에 빗대어 주체성을 상실하고 수동적이며 기계적인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비인간적인 삶의 모습과 현대 사회를 풍자하면서 비판하고 있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주인공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진술하는 방식은, 인간의 사물화라는 사태를 냉정하게 드러내는 효과적인 방법이 되고 있다. 특히, ‘의자 고행’, ‘손익관리대장경과 자금수지심경’, ‘굽실굽실 108’, ‘30년간의 장좌 불립’, ‘묵언으로 일관’, ‘통장으로 들어온 시주등은 모두 주체성을 상실하고 사물화된 삶을 살아가는 사무원의 모습을 불교 수행에 빗대어 풍자하기 위한 것이다.    

 

 어느 사무원의 30년간의 반복된 일상의 모습은 30년간의 '장좌불립(長座不立)'이라는 말로 풍자된다. 그는 아침 그는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 일해야만 했기에, 그것은 가히 의자 고행이라 부를 만하다. 심지어 의자 다리와 그의 다리는 구별할 수 없는 일체가 되어 버리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이것은 사무원의 삶의 모습이 사물과 다름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암시한다.

 

 또한 매일매일 먹는 도시락은 공양으로, 하루 종일 반복되는 업무는 은둔혹은 염불’, ‘묵언등의 불교적 용어로써 풍자되며, 상사에 무조건적으로 충성하는 모습 역시 ‘10라는 용어를 통해 묘사된다. ‘이미 습관이 모든 행동과 사고를 대신할경지에 이르렀을 만큼 는 주어진 업무에 충실하다. 사물화되어 버린 사무원의 모습일 뿐이다. 이것 또한 자기 삶에 대한 성찰적 태도가 결여된 채 현상 유지에 급급해하며 주어진 일만 수행하는 수동적인 사무원의 모습이며, 이는 인간 본연의 가치 추구와는 거리가 멀다.

 

 이렇게 일하지만, 결국 그에게 남은 것은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두려움과 채워지기가 무섭게 비워지는 통장뿐이다. 이러한 일상은 거의 종교적 수행에 가까울 만치 절대적인 것이며, 개인의 주체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이러한 풍자와 비판의 초점이 되는 것은 자신의 주체성을 상실하고 반복되는 일상 속에 함몰된 라는 인물만이 아니다. 개개인의 개성을 무시하고 로 대표되는 이 시대의 수다한 사무원의 일상을 마치 고행에 가까운 것으로 만들어 버린, 현대 사회의 관료적인 체제 그 자체가 이 시의 비판의 초점인 것이다. ‘는 이러한 현대 사회의 희생자 중의 한 사람으로 제시되고 있을 뿐이다.

 

 

작자 김기택(金基澤, 1957 ~ )

 

  시인. 경기 안양 출생. 1989한국일보신춘문예에 <가뭄><꼽추>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일상과 사물을 깊이 있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이를 특유의 묘사와 비유를 사용하여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시집으로 태아의 잠(1991), 바늘구멍 속의 폭풍(1994), 사무원(1999), (2005), (200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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