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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어린 시절이 기억나지 않는다 / 김기택

by 혜강(惠江) 2020. 4. 22.



<시>



어린 시절이 기억나지 않는다

 

 

- 김기택

 


창문이 모두 아파트로 되어 있는 전철을 타고
오늘도 상계동을 지나간다.
이것은 32, 저것은 24, 저것은 48,
일하지 않는 시간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나는 또 창문에 있는 아파트 크기나 재본다.


전철을 타고 가는 사이
내 어릴 적 모습이 기억나지 않는다.
어렸을 때 나는 어떤 아이였을까?
어떤 모습이었을까? 무엇을 하며 놀았을까?
나를 어른으로 만든 건 시간이 아니라 망각이다.
아직 이 세상에 한 번도 오지 않은 미래처럼
나는 내 어린 시절을 상상해야 한다.
지금의 내 얼굴과 행동과 습관을 보고
내 어린 모습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그러나 저 노약자석에 앉아 있는 노인들의
어릴 적 얼굴이 어떤 모습인지 알지 못하듯이
기억은 끝내 내 어린 시절을 보여주지 못한다.
지독한 망각은 내게 이렇게 귀뜸해준다.
너는 태어났을 때부터 이 얼굴이었을 거라고.


전철이 지하로 들어가자
아파트로 된 창문들이 일제히 깜깜해지더니
또 다른 아파트 창문 같은 얼굴들이 대신 나타난다.
내 얼굴도 어김없이 그 사이에 끼여 있다.
어럴 적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 시집 (2005) 수록


 

이해와 감상


 <어린 시절이 기억나지 않는다>2005년에 펴낸 시집 에 실려있는 김기택의 시이다. 시인은 이 시집에서 도시화로 인해 변화된 삶의 양상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데, 이 시는 어른이 되어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잊어버린 자신을 반성하며 그 시절의 기억을 되살리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어른이 되어 일상에 찌들어 가면서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잃고 살아가는 현대 도시인의 삶을 비판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화자의 내면 심리에 초점을 맞추어 독백체로 시상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시적 화자는 전철을 타고 가며 아파트로 둘러싸인 상계동을 바라본다. ‘아파트전철은 각각 현대 도시인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주거공간이며. 이동 수단이다. 여기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릴 적 모습을 기억할 수 없다. 시적 화자는 아파트 평수로 대변되는 어른의 삶과 어린 시절의 기억을 대비시키면서 순수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망각한 채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경계한다. 그래서 화자는 나를 어른으로 만든 건 시간이 아니라 망각이라고 한다.’

 

 아무리 애써 어린 시절을 떠올리려 해도, 어린 시절은 이 세상에 한번도 오지 않은 미래처럼결코 생각나지 않는다. 그리고 지독한 망각너는 태어났을 때부터 이 얼굴이었을 거라고귀뜸해 준다. 어릴 적 모습이 현재와 같았을 것이라는 말은 어릴 적 모습을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려 해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자조적으로 탄식하는 말이다.

 

 하지만 결국 전철이 지하로 들어가’ ‘아파트로 된 창문이 깜깜해지면서 깜깜한 창문에에는 현재 화자의 모습만 나타날 뿐 어릴 시절의 기억은 여전히 떠오르지 않은 채 시는 마무리된다. 이것은 바로,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잃고 살아가는 현대 도시인의 자화상이다.

 

 이 시는 고달프고 각박한 삶에 짓눌려 왜소해진 현대인의 모습을 각인시키는 것으로서 독자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성찰하게 하려는 화자의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작자 김기택(金基澤, 1957 ~ )

 

 시인. 경기 안양 출생. 1989한국일보신춘문예에 <가뭄><꼽추>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일상과 사물을 깊이 있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이를 특유의 묘사와 비유를 사용하여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시집으로 태아의 잠(1991), 바늘구멍 속의 폭풍(1994), 사무원(1999), (2005), (200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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