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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 김기택

by 혜강(惠江) 2020. 4. 21.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 김기택

 

 

텔레비전을 끄자

풀벌레 소리

어둠과 함께 방 안 가득 들어온다

어둠 속에 들으니 벌레 소리들 환하다

별빛이 묻어 더 낭랑하다

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큰 울음 사이에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

그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한다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까맣고 좁은 통로들을 생각한다

그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

여린 마음들을 생각한다

발뒤꿈치처럼 두꺼운 내 귀에 부딪쳤다가

되돌아간 소리들을 생각한다

브라운관이 뿜어낸 현란한 빛이

내 눈과 귀를 두껍게 채우는 동안

그 울음소리들은 수없이 나에게 왔다가

너무 단단한 벽에 놀라 되돌아갔을 것이다

하루살이들처럼 전등에 부딪쳤다가

바닥에 새카맣게 떨어졌을 것이다

크게 밤공기를 들이쉬니

허파 속으로 그 소리들이 들어온다

허파도 별빛이 묻어 조금은 환해진다

 

             - 시집 (2005) 수록

 


시어 풀이

*낭랑(琅琅)하다 : 옥이 서로 부딪쳐 울리는 소리가 아주 맑다.

*현란(絢爛):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이해와 감상

 

 이 시가 수록된 시집 를 펴낸 김기택 시인은 시집에 수록한 짧막한 산문에서 내 몸은 매일, 매 순간, 앓는다병과 상처는 내 눈이고 코고 입이고 손발이다고 적었다. 병과 상처가 오히려 시적 촉수가 된다는 의미다.

 

 이 시는 풀벌레 소리를 통해 자연 친화의 정서를 드러내며 문명에 길들여 가는 인간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늘 시끄럽고 요란한 소리를 뿜어내는 텔레비전 앞에서 저녁 시간을 보내던 화자가 텔레비전을 끄고 풀벌레 소리를 듣게 된 경험을 통해, 잊고 사는 것에 대한 소중함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시는 내용상 다섯 단락으로 구분 지을 수 있다. 화자는 텔레비전을 끄자’ ‘어둠과 함께풀벌레 소리가 방안 가득들어온다고 한다. 텔레비전을 끈 후, 평소에 관심을 두지 못했던 풀벌레 소리가 지각된 것이다. (1~3),

 

 그 풀벌레 소리에 귀가 뜨인 화자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벌레 소리에 별빛이 묻어있고, 그래서 더 낭랑하게 들린다. (4~5)

 

 이런 풀벌레 소리를 듣는 순간 화자는 문득, ‘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큰 울음 사이에는작은 풀벌레들이 내는 소리가 있을 것이라고 인식한다. 그 작은 풀벌레들의 소라가 텔레비전의 소리 때문에 벽에 부딪혀 돌아가 버려 자신과 소통하지 못했음을 상기하면서 작은 풀벌레의 소리에 무심했던 자신을 반성하고 안타까워한다. (6~12)

 

 나아가 화자는 그 작은 풀벌레 소리가 브라운관이 뿜어낸 현란한 빛이/ 내 눈과 귀를 두껍게 채우는 동안 그 울음소리들은 수없이 나에게로 왔다가단단한 벽에 놀라 되돌아가거나, 전등에 부딪혀 새까맣게 떨어졌을 것을 생각한다. 여기서 텔레비전은 내 눈과 귀를 두껍게 채우는대상으로, 풀벌레들이 내는 자연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하는 문명의 기기일 뿐이다. 그러므로 텔레비전이 내는 소음은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13~20)

 

  그런 이유로 화자는 이러한 텔레비전으로 인해 풀벌레 소리를 간과했던 그동안의 삶을 성찰하면서 밤공기 들이쉬니풀벌레 소리가 허파 속으로 들어온다라며, 풀벌레 소리가 내면 깊숙이 들어왔다는 뜻으로, 그동안 자신이 잊고 살았던 자연이 주는 평온함을 비로소 인식하게 된다. (21~23)

 

 이 시는 텔레비전의 빛과 소리로 대표되는 인공적인 삶의 환경들과 어둠, 별빛, 풀벌레 소리로 대표되는 자연의 삶을 대조함으로써 화자는 차분히 자신의 내면을 돌아볼 시간도 없이 그저 인공적인 삶 속에서 원초적인 쾌락에 몸을 내맡겨 버린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의 자세를 드러내고, 가까이 왔다가 되돌아가는 풀벌레들의 존재를 알리며 현대인들에게도 내면을 채울 수 있는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기를 권유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는 문명 비판적이며, 자연 친화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시 제목에 드러나거니와 시인은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하고 있다. 풀벌레들에게 작은 귀가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 작은 귀로 이 세상의 온갖 소리를 듣는 풀벌레들을 떠올려 본 적이 있는가? 시인은 텔레비전 소리에 묻힌 풀벌레들의 소리를 시 세계로 불러내고 있다.

 

 텔레비전으로 대표된 문명은 사람들의 감각을 무디게 한다. 텔레비전을 끄는 일은 문명을 거부하는 게 아니다. 문명을 거부한 채 자연 속에서 사는 건 이제 불가능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작은 생명들이 내보내는 소리들이 있다는 것이다. 과학이 인류의 미망을 걷어냈지만, 그래서 더 현명해진 것 같지는 않다. 지나치게 문명에 매몰되어 오감이 무디어지면,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게 비극이다. 그래서 자연친화 사상은 문명 세계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닐까?

 


작자 김기택(金基澤, 1957 ~ )

 

 시인. 경기 안양 출생. 1989한국일보신춘문예에 <가뭄><꼽추>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일상과 사물을 깊이 있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이를 특유의 묘사와 비유를 사용하여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시집으로 태아의 잠(1991), 바늘구멍 속의 폭풍(1994), 사무원(1999), (2005), (200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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