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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by 혜강(惠江) 2020. 4. 18.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 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버렸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하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1979) 수록

 

 

시어 풀이

 

*세밑 : 한 해의 마지막 때.
*대포 : 술을 별 안주 없이 큰 그릇에 따라 마시는 일.

*: 땅이 우묵하여 물이 괸 곳. (). 여기서는 빠져나오기 힘든 상태나 상황’.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일상적 삶에서 얻은 구체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 날의 이상과 열정을 잃고 현실에 순응하여 살아가는 소시민적 삶에 대한 부끄러움을 그리고 있다

 

 1960년 서울대학교 독문학과에 입학한 김광규는 그해 419일 독재 타도를 외치는 학생 시위대에 섞여 경무대를 향해 행진했는데, 그의 시 정신의 밑바닥에는 이때의  419 경험이 짙게 깔려 있다.

 

 시의 제목인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는 돌아갈 수 없는 젊은 날의 순수한 열정과 추억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을 드러낸 것으로 화자는 시간이 흘러 중년의 기성세대가 되어 이러한 순수한 열정을 잃어버리고 소시민적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드러내며 반성하고 있다.

 

 이 시는 과거와 현재의 삶을 대비하여 현재 화자가 느끼는 부끄러움의 정서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평범한 일상어를 사용하여 생동감을 느끼게 하며, 변하지 않는 자연물인 플라타너스 가로수를 통해 반성의 계기를 삼고 있다.

 

 마치 소설과 같은 서사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는 이 시는 전반부에서 화자는 젊음과 열정을 지녔던 과거의 젊은 시절을 회고하고, 후반부에서 중년의 나이가 되어 동창회에서 겪은 일과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한 반성과 상념을 서술하면서 과거와 현재를 대비시키고 있다.

 

 젊은 시절의 화자는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열띤 토론을 벌이며, 꿈과 이상을 추구하며, 대포를 마시고 노래도 부르며, 젊음만이 가질 수 있는 이상과 순수함으로 현실을 개혁하고자 고민한다. 그런데 노래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는 대목에서 암시하듯, 18년이 흘러 중년이 된 화자는 젊은 시절의 순수한 이상은 사라지고 소시민이 되어 버린 자신과 친구들의 모습을 발견한다. 처자식의 안부’, ‘월급’, ‘물가’ ‘잡다한 세상사를 나누고 노래도 부르지 않으면서 포커와 춤을 추는 모습이 현재에 순응하고 안주하는 전형적인 소시민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그런데 화자는 허전하게 옛사랑이 피흘린동숭동 길을 걸어오면서 예전 그대로 변함없이 서 있는 플라타너스 가로수의 모습을 발견한다. 플라타너스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이 흔들며 젊은 날의 순수와 열정을 내버린 채 나약한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화자에게 부끄러움을 일깨운다. 하지만, 화자는 소시민으로 주저앉아 살아가는 현재의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하면서도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며 부끄러움을 외면하고 소시민적 일상으로 깊숙히 돌아간다. 여기서 은 헤어날 수 없는 소시민적 일상을 상징하는 것으로, 현실에 순응하고 속물(俗物)로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다.

 

 

작자 김광규(金光圭, 1941 ~ )

 

 

 시인. 서울 출생. 1975문학과 지성<영산>, <유무> 등을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그의 시는 1960년대의 난해하고 현실과 유리된 관념시의 형태를 벗어나, 시적 세계와 현실 세계와의 단절을 메꾸면서 동시에 시의 언어에 살아 움직이는 현실적 생동감을 불어넣어 주는 시를 썼다. 따라서, 평이하고 구체적인 체험이 담긴 탄력 있는 그의 시는 현실과의 간격은 물론이고 시와 독자 사이의 거리도 많이 좁히게 되었다. 그의 시는 평이한 언어와 명료한 구문으로 쓰인 일상시이면서도 그 속에 깊은 내용을 담고 있어 삶의 허구성을 집요하게 비판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첫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1979)을 선보인 뒤 이제까지 아니다 그렇지 않다(1983) · 크낙산의 마음(1986) · 좀팽이처럼(1988) · 아니리(1990) · 물길(1994) ·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1998)등을 잇달아 펴내고, 시선집 반달곰에게(1981)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1988) 등을 내놓았다. 이처럼 꾸준히 시를 써오는 동안 제1녹원 문학상’(1981), 5오늘의 작가상’(1981), 4김수영 문학상’(1984), 4편운 문학상’(1994) 등을 받았다.

 



 

/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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