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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묘비명(墓碑銘) / 김광규

by 혜강(惠江) 2020. 4. 18.

 

 

 

 

 

 

묘비명(墓碑銘)

 

 

- 김광규

 

 

 

한 줄의 시()는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꿋꿋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史料)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詩人)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1979)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화자가 묘비명을 보면서 권력의 기만적인 통치술과 그에 아첨하는 세력, 그리고 비이성적인 대중들의 모습을 통하여 현대사회를 비판한 작품이다.

 

이 시는 의 대비를 통해 주제 의식을 드러내고 있으며, 정신적 삶의 가치가 경시되는 현실을 비판하기 위하여 반어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며, 세속적 가치에 종속된 문인을 비판하기 위해 풍자의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 시에는 어떠한 정신적 가치도 추구한 적이 없는 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1~6행에서는 의 행위를 통해서 정신적 가치가 경시(輕視)되는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한 줄의 시는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는 사람이 을 벌고 높은 자리에 올라 행복하게 살다가 죽은 후에도 묘비에 비석을 남기는 현실을 반어적 표현으로 비판한다. 이 시에서 '''소설'은 정신적 가치를, ‘높은 자리는 물질적 가치를 상징한다.

 

그런데 화자는 7~8행에서 그의 묘비명을 유명한 문인이 기록하는 아이러니를 포착하고 한다. 문인은 어디까지나 정신적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고 고상한 삶을 살아햐 할 사람인데, 여기서 유명한 문인은 부와 권력에 종속된 자, 물질적 가치에 굴복한 자로서 풍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목격한 화자는 9~14행에서 개탄을 금치 못하고 있다. 그렇게 쓰인 묘비명이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가 될 것이라며 반어적인 표현으로 풍자한 뒤,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화자는 풍자에서 그치지 않고 잘못된 역사 기록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것은 현실과 왜곡된 역사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현시대에 대한 풍자이며 가진 자가 미화되는 역사에 대한 비판이다.

 

결국, 이 시는 물질적 가치가 정신적 가치를 압도하는 사회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으로 읽을 수도 있으나, 시인의 입장에서 물질적 가치에 추종하는 시인에게 '시인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고 일침을 가한 것으로 볼 때, 시인에게 초점을 맞춘 듯 보인다. 모름지기 시인이 남길 것은 올바름을 추구하는 정신이요, 왜곡된 사실과 역사를 고발하는 정신이다. 이러한 정신을 어떻게 해야 남길 것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작자 김광규(金光圭, 1941 ~ )

 

 

 시인. 서울 출생. 1975문학과 지성<영산>, <유무> 등을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그는 4.19 세대로서 그의 시 정신의 밑바닥에는 419 경험이 짙게 깔려 있다. 그리고 그의 시 세계는 일상적 체험을 성찰적인 시선으로 바라봄으로써 인간적인 가치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태도, 세태 비판과 자연과 생태 문제에 관한 관심이 두드러지는 작품들을 많이 써서, 생활 세계에 근거한 일상성의 미학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첫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1979)을 선보인 뒤 이제까지 아니다 그렇지 않다(1983) · 크낙산의 마음(1986) · 좀팽이처럼(1988) · 아니리(1990) · 물길(1994) ·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1998)등을 잇달아 펴내고, 시선집 반달곰에게(1981)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1988) 등을 내놓았다.

 

 

 

/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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