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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추일서정(秋日抒情) / 김광균

by 혜강(惠江) 2020. 4. 19.

 

 

추일서정(秋日抒情)   

 - 김광균


낙엽(落葉)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포화(砲火)에 이즈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게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 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차가 들을 달린다
포푸라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낸 채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세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쪽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간다

 - 인문평론(1940) 수록

 

시어 풀이

*포화(砲火) : 총포를 쏠 때 일어나는 불.

*도룬시 : 폴란드의 도시 이름.
*일광(日光) : 햇빛.
*근골(筋骨) : 근육과 뼈대.

*철책 (鐵柵) : 쇠로 만든 울타리.

*셀로판지(cellophane) : 셀로판종이(셀로판 표면에 수지나 나이트로셀룰로스 따위를 발라 만든 종이).

*황량한 : 황폐하여 거칠고 쓸쓸한.  

 

이해와 감상

 이 시는 1930년대 모더니즘 시의 특성을 잘 보여 주는 작품으로, ‘추일(秋日)’에 바라본 가을의 황량한 풍경을 통해 현대인의 고독감을 형상화한 시이다.

 모더니즘 계열의 작품답게 시각적 이미지와 이국적이고 도시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가을날의 황량한 풍경을 묘사하고 있으며, 은유와 직유 등의 비유를 통해 대상을 표현하고 있다.

 이 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선경후정(先景後情)의 방식으로 시상을 전개하고 있는 이 시에서 1~11행까지는 가을날의 풍경을, 12~16행에서는 화자가 느끼는 가을의 고독한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

 전반부는 쓸쓸한 가을날의 풍경이 다양한 비유로 제시되어 있다. ‘망명 정부의 지폐와 같은 쓸쓸한 낙엽, 포화에 이즈러진 듯한 가을 하늘, 풀어진 넥타이와 같이 초라하고 구불구불한 길, 담배 연기와 같이 연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열차, 그리고 포플라 나무의 근골, 흰 공장의 지붕, 구부러진 철책 등의 소재가 은유와 직유의 방법으로 이국적이며 도시적인 가을날의 황량한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12행부터 마지막 행까지는 앞부분에서 묘사된 쓸쓸한 분위기 속에서 고독감에 방황하는 화자의 모습이 제시되어 있다.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에 공연히 풀벌레 소리들리는 풀섶을 발로 차 보기도 한다. ‘자욱한 풀벌레 소리는 청각적 이미지인 풀벌레 소리를 시각적 심상으로 전이시킨 공감각적 표현이다. 그리고 화자는 황량한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허공에 돌을 던지기도 한다. 특히 돌을 던지는 행위는 현대 도시 문명의 황량함과 각박한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데,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간다.’는 표현으로 미루어 볼 때, 결국 화자는 황량한 정서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이 시는 회화적이고 감각적인 이미지들이 모여 한 편의 시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이 시는 1930년대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시에 해당한다.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며 사물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주지적인 성향(감정보다는 이성이나 지성을 중시함.)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작품 속의 여러 이미지는 소멸과 조락, 도시적 감수성을 드러내는 서구적 이미지로 이 시의 주제인 도시의 가을 풍경에서 느껴지는 황량함과 고독감을 드러내는 데 효과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작자 김광균(金光均, 1914~1993)

  시인 · 실업가. 경기도 개성 출생. 중앙일보에 시 <가는 누님>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인부락, 자오선동인. 김기림, 정지용과 더불어 1930년대 우리나라의 모더니즘, 그중에서도 이미지즘 시 운동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시인이다. 그는 도시 문명적 소재를 시각적으로 새롭게 형상화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고, 또한 공감각적인 이미지를 적절히 사용하여 감각적 묘사에도 뛰어난 성과를 드러냈다. 더 나아가 김광균은 관념적이거나 정서적인 내용마저 회화적으로 그려서 표현함으로써, 새로운 인식의 장을 열었다.

  김광균은 이러한 묘사와 함께 도시인이 느끼는 허무감이나 고독감 등을 아울러 드러내고 있다. 시집으로 와사등(1939), 기항지(1947), 황혼가(1957) 등이 있다. 

 

/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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