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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엄마의 발 / 김승희

by 혜강(惠江) 2020. 4. 29.






엄마의 발

 

- 김승희

 

 

딸아, 보아라,

엄마의 발은 크지,

대지의 입구처럼

지붕 아래 대들보처럼

엄마의 발은 크지.

 

엄마의 발은 크지만

사랑의 노동처럼 크고 넓지만

딸아, 보았니,

엄마의 발은 안쪽으로 안쪽으로

근육이 밀려 꼽추의 혹처럼

문둥이의 콧잔등처럼

밉게 비틀려 뭉그러진 전족*

기형*의 발

 

신발 속에선 다섯 발가락

아니 열 개의 발가락들이

도화선*처럼 불꽃을 튕기며

아파아파 울고

부엉부엉 후진국처럼 짓밟히어

평생을 몸살로 시름시름 앓고

 

엄마의 신발 속엔

우주에서 길을 잃은

하얀 야생 별들의 신비한 날개들이

감옥 창살처럼 종신수*로 갇히어

창백하게 메마른 쇠스랑 꽃 몇 포기를

조화처럼

우두커니 걸어놓고 있으니

 

딸아, 보아라,

가고 싶었던 길들과

가 보지 못했던 길들과

잊을 수 없는 길들이

오늘 밤 꿈에도 분명 살아 있어

인두로 다리미로 오늘 밤에도 정녕

떠도는 길들을 꿈속에서 꾹꾹 다림질해 주어야 하느니

네 키가 점점 커지면서

그림자도 점점 커지는 것처럼

그것은 점점 커지는 슬픔의 입구,

 

세상의 딸들은

하늘을 박차는 날개를 가졌으나

세상의 여자들은 아무도 날지를 못하는구나,

세상의 어머니는 모두 착하신데

세상의 여자들은 아무도 행복하지 않구나

 

                  - 시집 달걀 속의 생(1989)

 


시어풀이

*전족(纏足) : 중국의 옛 풍습에서, 여자의 발을 작게 하려고 어릴 때부터 피륙으로 발가락을 감아 자라지 못하게 하던 일. 또는 그렇게 만든 발.

*기형(奇形) : 괴이한 형체

*도화선(導火線) : 화약이 터지도록 불을 붙이는 심지. 사건 발생의 직접적인 원인.

*종신수(終身囚) : 무기수, 즉 무기형을 선고받고 징역살이를 하는 죄수.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꿈과 이상을 잃은 채 희생을 강요당하며 살아야 했던 여성의 슬픔과 고통을 드러내는 한편, 여성이라는 이유로 희생된 삶을 강요받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 시는 여성이 겪는 삶의 고통과 아픔을, 신발 속의 보이지 않는 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으며, 딸에게는 여성으로서의 고통스러운 삶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은 화자가 자신의 바람을 딸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자상한 엄마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 동일한 시구를 반복하여 의미를 강조하고 리듬감을 주고 있다.

 

 모두 6연으로 구성된 시는 1연에서는 대지의 입구와 대들보처럼 커다란 엄마의 발을, 2연에서는 노동으로 인해 기형이 된 엄마의 발을, 3연에서는 고통으로 아파하는 엄마의 열 개의 발가락을, 4연에서는 사라져 버린, 엄마의 꿈과 이상을, 5연에서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서 오는 갈등을, 마지막 6연에서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자기 정체성을 잃어 가는 여성들에 대해 안타까움을 노래하고 있다.

 

 신발 속에 감추어진 엄마의 발은 여성 또는 엄마로 사는 삶에서 겪는 고통과 아픔을 상징한다. ‘엄마의 발은 겉으로 보기에는 대지의 입구처럼 크고, 지붕을 받치고 있는 대들보처럼 튼튼하지만, 사실 속으로는 엄마에게 요구되는 희생 때문에, 비틀리고 뭉그러진 기형의 발이 되어 있다. 화자는 자신의 발을 꼽추의 혹문둥이의 콧잔등에 비유하고 있는데, 이는 그만큼 삶이 고통스럽고 절망적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열 개의 발가락이 후진국처럼 짓밟히며 평생을 시름시름 앓고 있다고 한 것도,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으로 사는 삶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지를 비유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어 화자는, 화자가 가졌던 꿈과 이상을 사회 제도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움과 억압된 삶의 굴레에 갇히지 않은 인간다운 삶을 야생 별야생 조들의 신비한 날개에 비유하여, 화자는 엄마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기 위한 꿈을 가진 존재였지만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은 희생과 인내를 강요당한다. 이런 현실에서 화자는 자신의 꿈과 희망은 모두 잃어버린 채 평생을 감옥에서 살아야 하는 종신수(終身囚)’가 되어, 죽은 사람에게 조의를 표할 때 쓰는 조화(弔花)처럼 죽은 삶을 살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화자는 한 인간으로서 가졌던 꿈과 이상은 가고 싶었던 길, 가 보지 못했던 길, 잊을 수 없는 길이 되어 밤마다 꿈속에서 선명하게 나타나지만, 그럴 때마다 그 꿈들을 다림질로 꾹꾹 눌러 버려야 하는, 자아 정체성과 모성 사이에서 갈등하며 괴로워한다. 그렇게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갈등하는 화자는 세상의 어머니는 모두 착하신데/ 세상의 여자들은 아무도/ 행복하지 않구나……라며 안타까움을 피력하면서, 말없음표로 독자에게 생각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이처럼 이 시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꿈과 이상을 포기하고 가족에게 희생하며 살 수밖에 없는 여성으로서의 슬픔을 엄마의 발이라는 소재를 통해 그려 내고, 나아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희생된 삶을 강요받는 남상 중심의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시는 사회 비판적이며, 페미니즘적인 성격을 띤다.

 


작자 김승희(金勝熙, 1952 ~ )

 

 시인. 1973년  경향신문신춘문예에 시 <그림 속의 물>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그의 시는 일상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무한한 자유의 삶이 무엇인가를 묻고 탐구하는 시를 썼다. 시집으로 태양 미사(1979), 왼손을 위한 협주곡(1983), 미완성을 위한 연가(1987), 달걀 속의 생(1989),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1991),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1993)이 있다.

 

 한편 그는 1994동아일보신춘 문예에 단편 <산타페로 가는 사람>이 당선되어 소설 창작에도 나선다. 소설가로서 그는 창작집 산타페로 가는 사람(1997), 장편 소설 왼쪽 날개가 약간 무거운 새(1999)를 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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