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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고고(孤高) / 김종길

by 혜강(惠江) 2020. 5. 4.

 

 

 

고고(孤高)

 

- 김종길

 

북한산이
다시 그 높이를 회복하려면
다음 겨울까지는 기다려야만 한다.

밤사이 눈이 내린,
그것도 백운대나 인수봉 같은
높은 봉우리만이 옅은 화장을 하듯
가볍게 눈을 쓰고

왼 산은 차가운 수묵(水墨)으로 젖어 있는,
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까지는 기다려야만 한다.

신록이나 단풍,
골짜기를 피어오르는 안개로는,
눈이래도 왼 산을 뒤덮는 적설(積雪)로는 드러나지 않는,

심지어는 장밋빛 햇살이 와 닿기만 해도 변질하는,
그 고고(孤高)한 높이를 회복하려면

백운대와 인수봉만이 가볍게 눈을 쓰는
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까지는
기다려야만 한다.

 

- 시집 하회에서(1977) 수록

 

시어 풀이

*수묵(水墨) : 이 엷은 먹물.

 

이해와 감상

 

  이 시는 고고한 삶의 자세와 정신세계에 대한 지향(의지)을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시에서의 고고는 화자가 추구하는 고고한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고결한 높이를 회복하기 위한 북한산의 바람을 통해 고고한 삶의 자세를 추구하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이 시에서 노래하고 있는 고고함이란 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까지는 기다려야 겨우 확인할까 말까 한 것일 수 있다. 즉 고고함이라는 정신세계는 세속화를 거부하는 것인 동시에 삶의 긴장감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쉽게 변질될 수 있어서 긴장감을 늦추어서는 얻을 수 없는 세계의 것이다. 이것은 시인이 추구하는 고고한 정신세계를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는 대비적 표현을 통해 주제 의식을 드러내고 있으며, ‘기다려야만 한다라는 동일한 시구를 반복하여 주제를 강조하고 있다. 또 비유적 표현을 활용하여 고고함이 드러나는 상황을 표현하고 있으며, ‘백운대’, ‘인수봉등 실제명칭을 사용함으로써 사실감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시적 화자는 북한산이 그 고고함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다음 겨울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가볍게 눈을 쓰고 차가운 수묵으로 젖어 있는 겨울날 이른 아침까지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눈이라도 왼 산을 뒤덮는 적설로는그 고고함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옅은 화장은 산봉우리에 눈이 살짝 쌓인 북한산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는 산의 미묘한 변화에 주목한 표현이다. ‘차가운 수묵은 겨울 산의 모습을 그림에 비유하여 표현한 것으로 옆은 화장과 함께 고고함을 드러내 주는 것들이다. 반면 신록’, ‘단풍’, ‘안개와 같은 소재들은 겨울이 아닐 때의 산의 모습으로 고고함을 드러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다. 이들과의 대비를 통해 겨울 산의 의미를 부각하고 있다.

  ‘왼 산을 뒤덮는 적설은 가볍게 눈에 덮여 있는 상태와는 반대로서, 세속적인 것에서 벗어나 홀로 존재하는 산봉우리의 모습을 감추어 버린다. ‘장밋빛 햇살은 가볍게 눈 덮인 산봉우리의 속성을 변질시킨다. 산봉우리의 고고함은 긴장을 조금만 늦추어도 쉽게 변질될 수 있는 것이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김종길의 시는 언어가 매우 지적이며 절도 있고 간결하다. 그의 시는 영미 주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감정이나 감성을 억제하고 사물의 선명한 이미지의 조형에 주력한다. 이런 의미에서 김종길은 뛰어난 모더니스트 중의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명징한 이미지는 그의 시가 지닌 제일의 특성이다. 그러나 다른 이미지스트들과는 달리 김종길의 시는 고전적인 품격을 제공한다. 그의 시가 갖는 미덕은 탁월한 상상력으로 빚은 이미지의 명징성과 고전적 품격에서 비롯되는 정신적 엄결성의 우아한 조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 그의 시는 시인의 엄결적 태도를 반영하듯 높은 완성도와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작자 김종길(金宗吉, 1926 ~ )

  시인. 영문학자, 경북 안동 출생. 본명은 김치규. 1947경향신문신춘문예에 <()>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일상생활의 주변에서 시의 소재를 얻으며, 열띤 감정이나 감상, 혼돈에 젖지 않는 시풍을 이룬다. 시집으로 성탄제(1969), 황사 현상(1986), 해거름 이삭줍기(200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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