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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거문고 / 김영랑

by 혜강(惠江) 2020. 4. 30.

 

 

 

 

 

 

거문고

 

 

 

- 김영랑

 

 

 

검은 벽에 기대선 채로

해가 스무 번 바뀌었는디

내 기린(麒麟)은 영영 울지를 못한다.

 

그 가슴을 퉁 흔들고 간 노인의 손

지금 어느 끝없는 향연(饗宴)에 높이 앉았으려니

땅 우의 외론 기린이야 하마 잊어졌을라.

 

바깥은 거친 들 이리 떼만 몰려다니고

사람인 양 꾸민 잔나비 떼들 쏘다니어

내 기린은 맘둘 곳 몸둘 곳 없어지다.

 

문 아주 굳이 닫고 벽에 기대선 채

해가 또 한 번 바뀌거늘

이 밤도 내 기린은 맘 놓고 울들 못한다.

 

                  

  - 조광(1939)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김영랑의 작품 중에서 현실 인식이 비교적 강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소리를 마음껏 내면서 울지도 못한 채 벽에 기대 선 거문고를 통해, 암울한 시대 상황에서 자유를 빼앗긴 상태로 살아가는 화자의 답답함과 비애 어린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시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시어를 사용하여 주제 의식을 구현하는 이 시는 거문고기린으로 비유하여, 자유를 빼앗긴 화자 자신의 처지를 의인화하여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화자는 해가 바뀌는 시점에 서서 자신의 심정을 피력한 것으로 보인다. 화자는 검은 벽에 기대선 채로/ 해가 스무 번이나 바뀌었는디/ 내 기린(麒麟)은 영영 울지 못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검은 벽은 부정적 시대 상황인 일제 강점기를 의미한다. 화자는 이런 상황에서, 성인(聖人)이 이 세상에 나올 징조로 나타난다는 신령스러운 상상 속의 동물인 기린거문고를 비유하며, 이를 의인화하여 억압적인 상황 때문에 울지 못하는 거문고에 자신의 처지 혹은 정서를 의탁하여 제시하고 있다.

 

  거문고2연에서, 거문고를 타던 노인이 지금 어느 끝없는 향연에 높이 앉았으려니라는 말로, ‘거문고는 아주 오래전에 연주자를 잃고 방 안에 처박혀 있는 존재로, ‘외론 기린이야 하마 잊어졌을라에 감정을 이입하여 노인이 기린을 잊지 않았을 거라며, 화자 자신의 기대감을 드러낸다.

 

 3연은 '기린'이 마음과 몸을 둘 곳 없는 바깥 환경을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는데, ‘이리 떼잔나비 떼때문이라고 한다. ‘이리 떼는 부정적 상황인 일제를, ‘잔나비 떼는 일제에 영합하는 친일파 세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은 기린의 자유로운 활동을 억압하는 상황으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주권을 상실한 암담한 현실에 대한 인식을 드러낸다. 시대를 잘못 만나 제 곡조를 잃어버린 안타까운 처지를 드러낸다.

 

 마지막 4연은 기린이 맘 놓고 운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문 아주 굳이 닫고 벽에 기대선 채/ 해가 또 한 번 바뀌어도 울지 못한다고 한다. 여기서 문 아주 굳이 닫고는 억압적 현실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내면적 저항 의식을 보여주며, ‘맘 놓고 울를 못한다라는 표현에서는 부정적 현실에 대한 화자의 안타까움이 드러나 있다.

 

 이 작품은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과 같이 아름다운 시어와 낭만적인 감수성으로 대표되던 일반적인 김영랑의 시 세계와는 달리, 역사의식과 현실 인식이 두드러지고 있어서 그의 작품의 변모 과정을 살피는 데 도움이 된다. 김영랑은 후기의 여러 시작(詩作)에서 전통악기인 거문고, 가야금, 북 등을 선택하여 당대 우리 민족 전체가 겪고 있는 비극적 삶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작자 김영랑(永郞, 1903~1950)

 

 

 시인. 전남 강진 출생. 본명 윤식(允植). 1930년 박용철, 정지용 등과 함께 시 문학을 간행,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하며 순수 서정시 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잘 다듬어진 언어로 섬세하고 영롱한 순수 서정을 노래함으로써 한국 순수시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후기 시에서는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불행한 시대 상황에 맞서서 우리 민족이 겪고 있는 불행한 삶을 노래했다.

시집으로 영랑 시집(1935), 영랑 시선(1939) 등이 있고, 1981년 문학세계사에서 그의 시와 산문을 모은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있다.

 

 

 

<해설>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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