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767 유리창 / 정지용 유리창 - 정지용 유리(琉璃)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 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寶石)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肺血管)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山)새처럼 날아갔구나! - 《조선지광》 (1930) *열없이 : ① 기운 없이, ② 별다른 의미 없이, ③ 약간 부끄럽고 계면쩍게. *길들은 양 : 서투른 일이 익숙하게 된 듯. *폐혈관(肺血管) : 폐로 통하는 피의 관.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시인이 어린 자식을 잃고 아버지로서 느끼는 애절한 슬픔과 그리움을 노래한 작품이다. 이 시에서 ‘유리(유리창)’는.. 2020. 3. 17. 향수 / 정지용 향수 -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2020. 3. 16. 고향 / 정지용 고향 - 정지용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 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 출전 《동방평론》(1932)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그리던 고향에 돌아온 화자가 변함없는 고향의 모습을 확인하지만 자신이 마음속에 간직한 옛날의 고향이 아닌 것을 깨닫고 그에 대한 상실감을 노래하고 있다. 그런데, 이 상실감은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고향의 황폐화에 따른 상실감이 아니라 화자 자신의 정서와 인식의 변화로 인한 상실감이라는 데 그 특징이 있다. 회고적이며 애상.. 2020. 3. 16. 피아노 / 전봉건 피아노 - 전봉건 피아노에 앉은 여자의 두 손에서는 끊임없이 열 마리씩 스무 마리씩 신선한 물고기가 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 쏟아진다. 나는 바다로 가서 가장 신나게 시퍼런 파도의 칼날 하나를 집어 들었다. - 시집 《꿈속의 뼈》(1980)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생기 넘치는 피아노 소리의 감각과 이에 대한 감동을 과감하고 돌발적인 비유와 참신한 이미지를 통해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이 시는 피아노 치는 여자와 그 소리를 듣는 화자의 모습을 자유로운 연상에 의해 시상을 전개하고 있으며, 과감한 비유와 공감각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생기 있는 피아노 소리에 대한 감동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 또, 낯설게 하기 수법을 사용하여 돌발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생동감 있는 피아노 선율이 주는 감동을 표현하고 있.. 2020. 3. 15. 사랑 / 전봉건 사랑 - 전봉건 사랑한다는 것은 열매가 맺지 않는 과목은 뿌리째 뽑고 그 뿌리를 썩힌 흙 속의 해충은 모조리 잡고 그리고 새 묘목을 심기 위해서 깊이 파헤쳐 내 두 손의 땀을 섞은 흙 그 흙을 깨끗하게 실하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 아무리 모진 비바람이 삼킨 어둠이어도 바위 속보다도 어두운 밤이어도 그 어둠 그 밤을 새워서 지키는 일이다. 훤한 새벽 햇살이 퍼질 때까지 그 햇살을 뚫고 마침내 새 과목이 샘물 같은 그런 빛 뿌리면서 솟을 때까지 지키는 일이다. 지켜보는 일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 《전봉건 시선》(1985) ▲이해와 감상 진정한 사랑은 무엇일까? 누군가를, 또는 무엇인가를 사랑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 시의 화자는 대상을 사랑한다는 것을 과목(果木)을 가꾸는 것에 빗대어 새 과목이 돋아날.. 2020. 3. 15. 폭포 / 이형기 폭포 - 이형기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을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 시퍼런 칼자욱을 아는가. 질주하는 전율과 전율 끝에 단말마(斷末魔)를 꿈꾸는 벼랑의 직립(直立) 그 위에 다시 벼랑은 솟는다. 그대 아는가 석탄기(石炭紀)의 종말을 그때 하늘 높이 날으던 한 마리 장수잠자리의 추락(墜落)을. 나의 자랑은 자멸(自滅)이다. 무수한 복안(複眼)들이 그 무수한 수정체(水晶體)가 한꺼번에 박살나는 맹목(盲目)의 눈보라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시퍼런 빛줄기 2억 년 묵은 이 칼자욱을 아는가. - 《적막강산》(1963) 단말마(斷末魔) : ‘임종’(臨終)을 달리 이르는 말. 혹은 숨이 끊어질 때의 모진 고통. 석탄기(石炭紀) : 지질 시대의 하나. 거대한 양치식물이 많았고 파충류와 곤충류가 .. 2020. 3. 15. 낙화(落花) / 이형기 낙화(落花) - 이형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이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적막강산》(1963)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꽃이 피고 지는 자연의 순환을 인간의 ‘사랑’과 ‘이별’이라는 삶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꽃이 떨어지는 자연 현상을 통해 이별의 아픔이 영혼의 성숙으로 승화될 수 있음을 노래하고 있는 시이다. 화자인 ‘나’는 꽃이 지는 현상을 .. 2020. 3. 15. 황혼에 서서 / 이영도 황혼에 서서 - 이영도 산이여, 목 메인 듯 지그시 숨죽이고 바다를 굽어보는 먼 침묵은 어쩌지 못할 너 목숨의 아픈 견딤이랴. 너는 가고 애모(愛慕)는 바다처럼 저무는데 그 달래임 같은 물결 같은 내 소리. 세월은 덧이 없어도 한결같은 나의 정(情). - 《석류》(1958) ▲ 이해와 감상 여류 시인 이영도가 1958년에 발표한 이 시는 애모(愛慕)를 주제로 한 연시조이다. 사랑을 육성으로 외치는 것이 아니라 고결한 영혼으로 애모의 정과 꺾이지 않는 인내를 노래하고 있다. 첫 시조는 산을 노래하면서 시인 자신의 아픔을 노래한다. 둘째 시조는 시인 자신의 한결같은 정을 노래한다. 이영도 시인은 산과 물, 그 거대한 자연에 자신의 애정을 실어 탄주(彈奏) 한다. 그래서 그의 시조의 특성은 자연으로 시작해서 .. 2020. 3. 14. 아지랑이 / 이영도 아지랑이 - 이영도 어루만지듯 당신 숨결 이마에 다사하면 내 사랑은 아지랑이 춘삼월 아지랑이 장다리 노오란 텃밭에 나비 나비 나비 나비 - 출전 《석류》(1968) 다사하다 : 조금 따뜻하다. 장다리 : 무, 배추 따위의 꽃줄기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당신의 숨결로 촉발된 사랑의 감정을 봄날 아지랑이와 나비에 빗대어 표현한 현대 시조이다. 사랑의 감정을 봄날의 정경과 관련지어 서정적으로 표현한 시로, 화자는 사랑의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춘삼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으로 표현하면서 이러한 사랑의 감정으로 인한 설렘을 나비가 날아가는 듯한 시각적 표현을 활용하여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966년 이 작품이 발표되자 여러 가지 면에서 주목을 끌었다. 현대시조의 대다수가 연작(連作)인데 비.. 2020. 3. 14. 강강술래 / 이동주 강강술래 - 이동주 여울에 몰린 은어(銀魚) 떼. 삐비꽃 손들이 둘레를 짜면 달무리가 비잉빙 돈다. 가아응 가아응 수우워얼래에 목을 빼면 설움이 솟고…… 백장미(白薔微) 밭에 공작(孔雀)이 취했다. 뛰자 뛰자 뛰어나 보자 강강술래 뇌누리에 테이프가 감긴다. 열두 발 상모가 마구 돈다. 달빛에 배이면 술보다 독한 것 기폭(旗幅)이 찢어진다. 갈대가 스러진다. 강강술래 강강술래 - 《이동주 시집》 *삐비꽃 : ’삐디‘는 ’띠‘의 전라도 사투리. 벼과에 속하는 다년생 초본식물로 꽃이 피기 직전에 어리고 부드러운 꽃이 핀다. *달무리 : 달 언저리에 둥그렇게 생기는 구름 같은 허연 테. 공작(孔雀) : 공작새, 꿩과의 새. 꿩과 비슷하나 깃이 매우 화려하고 몸이 크다. *뇌누리 : 소용돌이,또는 여울의 옛말 *.. 2020. 3. 14. 오렌지 / 신동집 오렌지 - 신동집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오렌지는 여기 있는 이대로의 오렌지다. 더도 덜도 아닌 오렌지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을 벗길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찹잘한 속살을 깔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대는 순간 오렌지는 이미 오렌지가 아니고 만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다. 오렌지도 마찬가지 위험한 상태다. 시간이 똘똘 배암의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에 한없이 어진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누구인지 잘은 아직 몰라도. - 《누가 묻거든》(1.. 2020. 3. 13. 세월이 가면 / 박인환 세월이 가면 -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을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이해와 감상 이 시는 1956년 환도 후의 폐허가 된 명동 어느 술집에서 잊혀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과 상실의 슬픔, 사랑의 추억과 회상을 읊은 시로 도시적 감상주의와 센티멘탈리즘이 짙게 깔려 있어 우리의 가슴을 촉촉이 적셔주는 작품으로, 후일 노래 가사로 널리 소개되었다. 화자는 세월이 흘러도.. 2020. 3. 13. 목마(木馬)와 숙녀(淑女) / 박인환 목마(木馬)와 숙녀(淑女) -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木馬)를 타고 떠난 숙녀(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木馬)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少女)는 정원(庭園)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木馬)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女流作家)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燈臺)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 2020. 3. 13. 능금 / 김춘수 능금 - 김춘수 Ⅰ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Ⅱ 이미 가 버린 그날과 아직 오지 않은 그날에 머문 이 아쉬운 자리에는 시시각각의 그의 충실(充實)만이 익어 간다. 보라, 높고 맑은 곳에서 가을이 그에게 한결같은 애무(愛撫)의 눈짓을 보낸다. Ⅲ 놓칠 듯 놓칠 듯 숨 가쁘게 그의 꽃다운 미소를 따라가면은 세월도 알 수 없는 거기 푸르게만 고인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가 있다.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 《꽃의 소묘(素描)》(1959) ▲이해와 감상 이 시는 '능금'이 익어 가는 자.. 2020. 3. 13.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는 3월(三月)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精脈)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 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 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 《김춘수 시전집》(1976) *샤갈 : 러시아 태생의 프랑스 화가(1887~1985). 풍부한 개인적 경험을 화려한 색채와 환상적인 화풍으로 표현함으로써 초현실주의 미술에 영향을 끼침. *관자놀이 : 귀와 눈 사이의 맥박이 뛰는 곳. *쥐똥만 한 :.. 2020. 3. 13. 꽃을 위한 서시(序詩) / 김춘수 꽃을 위한 서시(序詩) - 김춘수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存在)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名)의 어둠에 추억(追憶)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 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新婦)여. - (1957) ▲이해와 감상 이 시에서 ‘꽃’은 인식의 대상이자 존재의 본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심오한 철학적 문제를 구체적인 시어를 사용하여 형상화함으로써 존재의 참모습을 인식하고자 하는 욕망을 노래한 작품이다. 화자는 존재론적 입장에서 사물의 본질을 추구하지만 끝내 알아내지.. 2020. 3. 12. 꽃 / 김춘수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시와 시론》 (1952>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1952년 《시와 시론》에 발표된 김춘수의 연작시 중 하나로, ‘꽃’을 제재로 하여 존재의 본질을 인식하고자 하는 인간의 근원적 갈망과 진정한 인간관계 형성에 대한 소망을 표현하고 있다. 화자는 누군가 자신의 본질에 맞는 이름을 불러 주기를 원하고 있으며, 사물의.. 2020. 3. 12. 솔개 / 김종길 솔개 -안동에서 - 김종길 병 없이 앓는, 안동댐 민속촌의 헛제삿밥 같은. 그런 것들을 시랍시고 쓰지는 말자. 강 건너 임청각(臨淸閣) 기왓골에는 아직도 북만주의 삭풍(朔風)이 불고, 한낮에도 무시로 서리가 내린다. 진실은 따뜻한 아랫목이 아니라 성에 낀 창가에나 얼비치는 것, 선열한 육사(陸史)의 겨울 무지개! 유유히 날던 학 같은 건 이제는 없다. 얼음 박힌 산천에 불을 지피며 오늘도 타는 저녁노을 속, 깃털 곤두세우고 찬 바람 거스르는 솔개 한 마리 - 《달맞이꽃》(1997) 수록 *헛제사밥 : 제사를 지내지는 않지만, 제사 음식처럼 차려 먹는 밥. 깨소금, 간장 따위를 넣어서 비벼 먹는다. *임청각(臨淸閣) : 경상북도 안동시 법흥동에 있는 조선 중기의 정자형 별당건축, 독립운동가 이상용의 거처 .. 2020. 3. 12. 자전거 / 김종길 자전거 - 김종길 내리막길에는 가속(加速)이 붙는다. 발은 페달에 올려놓으면 된다. 그러나 균형은 잡아야 한다. 무엇이 갑자기 뛰어들지도 모른다. 그런 뜻하지 않은 일에도 대비해야지. 그런데도 그런대로 편안한 내리막길, 바퀴살에 부서져 튕기는 햇살, 찌렁찌렁 울리는 방울. 언덕길 밑바지에선 해가 저물고 결국은, 결국은 쓰러질 줄 알면서도, 관성(慣性)에 몸을 실어, 제법 상쾌하게, 가을 석양(夕陽)의 언덕길을 굴러 내려간다.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아가면서, 지그시 브레이크도 걸어보면서.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석양의 내리막길에서 ‘자전거’를 타고 내려오는 상황을 인생의 황혼기에 유추함으로써 노년기의 죽음을 여유롭게 바라보는 삶의 태도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 2020. 3. 11. 고갯길 / 김종길 고갯길 - 김종길 시골 옛집 앞을 지나 뒷산 등성이를 오늘은 상여(喪輿)로 넘으시는 아버지. 낯익은 고갯길엔 마른풀 희게 우거졌고 이른 봄 찬 날씨에 허허로운 솔바람 소리. -아버지, 생전(生前)에 이 고갯길을 몇 번이나 숨차시게, 숨차시게 넘으셨던가요? ▲이해와 감상 아버지를 여읜 슬픔을 절제된 언어와 구체적인 이미지를 통해 형상화한 작품이다. 짧고 간결한 언어 표현과 서리를 뒤집어써 하얗게 우거진 마른풀의 모습, 차가운 봄 날씨, 허허로운 솔바람 소리 등의 구체적 이미지를 통해 아버지를 잃은 화자의 슬픔을 잘 드러내고 있다. 시에는 현란한 어휘나 특별한 표현 기교가 없다. 그저 아버지의 상여를 따라 고갯길을 오르다가 문득 아버지를 생각하는 솔직한 마음만 그려져 있다. 그런 소박한 화자의 마음이 오.. 2020. 3. 11. 사랑 / 김수영 사랑 - 김수영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 - 《거대한 뿌리》(1993) ▲이해와 감상 이 시는 풍부한 서정적 정감보다는 분석적이고 주지적인 시풍을 줄곧 유지했던 김수영 시인의 몇 안 되는 서정시 중의 대표적인 ‘사랑 시’이다. 그는 주로 감성보다는 지성에 토대하여 인간과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의 렌즈를 많이 써 온 시인이었기에 이 작품은 오히려 신선미를 느끼게 한다. 그는 이 시에서 사랑의 모순을 나타내고 있다. ‘어둠’이나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은 마치 영원불변할 것 같지만, ‘번개’처럼 환해졌다가 금세 어두워.. 2020. 3. 11. 푸른 하늘을 / 김수영 푸른 하늘을 - 김수영 푸른 하늘을 제압(制壓)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詩人)의 말은 수정(修正)되어야 한다 자유(自由)를 위해서 비상(飛翔)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革命)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 《거대한 뿌리》(1974) ▲이해와 감상 이 시는 4·19혁명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발표 직후 쓴 작품으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고 ‘혁명은 고독’한 것으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투쟁과 고통이 따르는 것이며, 혁명은 투쟁과 노력으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격정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화자는 감정의 절제를 통해서 자유와 혁명.. 2020. 3. 11.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 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한번 정정당당하게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派兵)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 야전병원(野戰病院)에 있을 때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 경찰이 되지 않는다고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 2020. 3. 10. 파밭 가에서 / 김수영 파밭 가에서 - 김수영 삶은 계란의 껍질이 벗겨지듯 묵은 사랑이 벗겨질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먼지 앉은 석경(石鏡) 너머로 너의 그림자가 움직이듯 묵은 사랑이 움직일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새벽에 준 조로의 물이 대낮이 지나도록 마르지 않고 젖어 있듯이 묵은 사랑이 뉘우치는 마음의 한복판에 젖어 있을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 《자유문학》(1960) 석경(石鏡) : 유리로 만든 거울. 조로 : 물뿌리개, 포르투갈 어인 ‘조로(jorro)’에서 유래한 말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새싹이 흙을 뚫고 나오는 ‘파밭’을 통해, 과거의 묵음 것을 버림으로써 새.. 2020. 3. 10. 풀 / 김수영 풀 -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창작과 비평》(1968) ▲이해와 감상 이 시는 김수영 시인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계하기 직전에 발표한 유작(遺作)으로, 나약한 속성을 지니지만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풀’을 제재로 하여 고통을 받고 살아온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시의 화자는 ‘풀’이 온갖 시련 속에서도 생명력을 유지할 것이라는 기대를 ‘풀’과 .. 2020. 3. 10. 폭포 / 김수영 폭포 - 김수영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規定)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高邁)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人家)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醉)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惰)와 안정(安定)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 《평화에의 증언》(1957) 고매한 : 인격이나 품성, 학식, 재질 따위가 높고 빼어난. 금잔화 : 국화과의 한해살이 꽃. 나타(懶惰) : 나태. 행동, 성격 따위가 느리고 게으름. ▲이해와 감상 폭포는 우렁찬 소리를.. 2020. 3. 10. 눈 / 김수영 눈 - 김수영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靈魂)과 육체(肉體)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 《문학 예술》(1956)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순수를 표상하는 ‘눈’을 제재로 하여 순수하고 정의로운 삶에 대한 소망과 부정적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형상화하고 있다. ‘눈’은 순수한 생명력의 상징으로, 화자는 ‘눈’과 ‘가래’를 대립적인 관계로 보고, 기침하여 가래를.. 2020. 3. 9. 정념(情念)의 기(旗) / 김남조 정념(情念)의 기(旗) - 김남조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 없는 것 모양 걸려 왔더니라.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눈 오는 네거리에 나서면, 눈길 위에 연기처럼 덮여오는 편안한 그늘이여, 마음의 기는 눈의 음악이나 듣고 있는가. 나에게 원(願)이 있다면 뉘우침 없는 일몰(日沒)이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가는 그것이란다. 황제의 항서(降書)와도 같은 무거운 비애(悲哀)가 맑게 가라앉은 하얀 모랫벌 같은 마음씨의 벗은 없을까.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에서 때로 울고 때로 기도 드린다. - 《정념의 기》(1960) 정념(情念):온갖 감정에 따라 일어나는 억누르기 어려운 생각 항서(降書):항복을 선언하고 항복에 대한 여러 조건 따위를 정한 문서 ▲.. 2020. 3. 9. 설일(雪日) / 김남조 설일(雪日) - 김남조 겨울나무와 바람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이적진 말로써 풀던 마음 말없이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祝宴)이라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 새해의 눈시울이 순수의 얼음꽃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위에 떨구이는 백설을 담고 온다. - 《김남조 시집》(1967) ▲시어 풀이 축연(祝宴) : 축하연, 축하하는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베푸는 잔치. ▲이해와 감상 ‘설일(雪日).. 2020. 3. 9. 그림엽서 / 김남조 그림엽서 - 김남조 여행지 상점가에서 그림엽서 몇 장 고를 때면 별달리 이름 환한 사람 하나 있어야겠다고 각별히 절감한다. 이국의 우표 붙여 편지부터 띄우고 그를 위해 선물을 마련할 것을 이 지방 순모 실로 짠 쉐타 하나, 목도리 하나, 수려한 강산이 순식간에 다가설 망원경 하나, 유년의 감격 하모니카 하나, 일 년 동안 품 안에 지닐 새해 수첩 하나, 특별한 꽃의 꽃씨, 잔디씨, 여수 서린 해풍 한 주름도 넣어 소포를 꾸릴 텐데 여행지에서 그림엽서 몇 장 고를 때면 불 켠 듯 환한 이름 하나의 축복이 모든 이 그 삶에 있어야 함을 천둥 울려 깨닫는다. - 《희망 학습》(1998) 별달리 : 다른 것과 특별히 다르게. 각별히 : 어떤 일에 대하여 유달리 특별한 마음가짐이나 자세로. 수려한 : 빼어나게 아.. 2020. 3. 8. 이전 1 ··· 13 14 15 16 17 18 19 ··· 2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