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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능금 / 김춘수

by 혜강(惠江) 2020. 3. 13.

 

 

 

 

 

능금

 

 

- 김춘수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이미 가 버린 그날과

아직 오지 않은 그날에 머문

이 아쉬운 자리에는

시시각각의 그의 충실(充實)만이

익어 간다.

보라,

높고 맑은 곳에서

가을이 그에게

한결같은 애무(愛撫)의 눈짓을 보낸다.

 

 

놓칠 듯 놓칠 듯 숨 가쁘게

그의 꽃다운 미소를 따라가면은

세월도 알 수 없는 거기

푸르게만 고인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가 있다.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 꽃의 소묘(素描)(1959)

     

 

이해와 감상

 

 

 이 시는 '능금'이 익어 가는 자연 현상을 통해 존재의 신비를 발견하고 거기서 느끼는 경이로움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그 경이로움은 무한한 그리움의 성숙과 자연의 교감(交感)에 의한 충만함이다.

 

 이 시의 화자는 능금을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인간과 같이 내면세계를 지닌 존재로 보고 있다. ‘능금의 내면세계는 그리움’, ‘충실’, ‘감정의 비다로 형상화되고 있으며, 이러한 존재의 본질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화자는 감동한다.

 

 정서의 표출과 지성의 절제가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가을 햇살과의 교감으로 충실히 익어 가는 '능금'을 통해 경이로움을 느끼게 되고, '능금'이라는 존재의 본질을 밝히게 된다. 이와 같은 결실과 성숙의 신비를 화자는 '그리움', '축제', '애무의 눈짓', '세월', '감정의 바다'와 같이 함축적 의미가 풍부한 시어를 구사하여 드러내고 있다.


 1연에서 화자는 그리움으로 익어 가는 능금을 표현하고 있다. ‘능금''그리움'을 통해 성숙하여 아름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되며, 결국 스스로의 '무게'로 인해 떨어지는 존재다. 이때의 '그리움''능금'의 본질로서 성숙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의 힘이라 볼 수 있다. 여기서 무게는 성숙의 무게로서 내면의 충실함을 뜻하며, ‘그윽한/ 여운은 성숙을 이룬 존재에 대한 감동을 드러내는 것이다.


 2연에서는 가을 햇살에 충실히 익어 가는 능금을 표현하고 있다. '이미 가 버린 그 날(과거)''아직 오지 않은 그 날(미래)' 사이인 '이 아쉬운 자리(현재)'에서 능금은 충실히 내적 성숙을 추구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가을이 그에게/ 한결같은 애무의 눈짓을 보낸다.’라는 표현은 가을 햇살이 능금의 성숙을 돕기 위해 사랑의 행동을 보여준다는 뜻이다.

 

 3연에서는 이렇게 충실히 익어 가는 '능금을 통해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존재의 경이로움)를 알게 된다는 것을 표현한다. 화자는 '능금'을 따라가다 '푸르게만 고인 /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를 발견하는데, 이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인식의 귀결이라 볼 수 있다.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는 존재의 경이로움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그리움과 충만함이 가득한 세계를 가리킨다. , ‘능금에는 시작도 끝도 없을 만큼 무한한 내면세계가 있다는 것을 형상화하고 있다. 시인은 '능금'을 통해 생명의 무한한 그리움과 충만함이 이루는 신비로운 내면세계를 그려 보고자 했다.

 

 이 작품은 존재의 본질과 경이로움을 능금이 익어 가는 과정을 통해 형상화하고 있는 시로, 함축적 의미가 풍부한 시어를 구사하여 딱딱한 지적 내용을 풍요로운 서정을 통해 그려 내는 것이 특징이다.

 

 이 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익어 가는 '능금'의 모습을 관조적 자세로 바라보며 '능금'의 실체를 파악하는 과정을 형상화하여 결국 존재의 본질에 대한 화자의 깨달음을 간결하게 진술하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작자 김춘수(金春洙, 1922~2004)

 

 

  시인. 경남 통영 출생. 1946년 광복 1주년 기념 시화집 날개<애가>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사물의 이면에 내재하는 본질을 파악하는 시를 써서 인식의 시인으로 불린다.

 

  시집으로 구름과 장미(1948), (1950), ()》』(1951), 인인(隣人)(1953), 꽃의 소묘(1959),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1959), 타령조 기타(打令調 其他)(1969)를 발간하였다. 특히 시집 타령조 기타는 언어 실험 기간을 거쳐 무의미 시로 넘어가는 전조를 보이면서 장타령의 가락을 끌어들이면서 현대문명 비판에 기울었으며, 내용보다 형식에 치우친 경향을 보인다. 이후 시집 처용(1974), 김춘수 시전집(1976), 남천(南天)(1977), 해외 기행 시를 주축으로 한 시집 라틴 점묘(點描) 기타(1988), 연작 장시 처용 단장(1991) 등에서 일련의 무의미 시를 펼친다.

 

   산문시집 서서 잠자는 숲(1993)30여 년간 시도했던 무의미 시의 종착점에서 그간의 방법론적인 긴장을 풀고 자유롭게 시상을 전개하였다. 이후 시집 ()(1995), 들림, 도스토옙스키(1997), 의자와 계단(1999), 거울 속의 천사(2001), 쉰한 편의 비가(2002) 등이 있다.

 

  김춘수는 언어와 대상 간의 관계를 고민하고 그 해답을 얻기 위해 고투했던 시인이자 시 이론가였다. 그가 제시한 무의미 시는 우리 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로 시문학사에 깊게 각인돼 있다. 특히 존재의 탐구, 대상의 즉물적 제시, 현실의 실감을 허무의 지로 승화시켰던 점에서 당대는 물론 한국 문학 미래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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