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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세월이 가면 / 박인환

by 혜강(惠江) 2020. 3. 13.

 

 

 

 

세월이 가면

 

 

-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을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이해와 감상

 

 

 이 시는 1956년 환도 후의 폐허가 된 명동 어느 술집에서 잊혀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과 상실의 슬픔, 사랑의 추억과 회상을 읊은 시로 도시적 감상주의와 센티멘탈리즘이 짙게 깔려 있어 우리의 가슴을 촉촉이 적셔주는 작품으로, 후일 노래 가사로 널리 소개되었다.


 화자는 세월이 흘러도 그 사람과 사랑했던 추억은 가슴에 남아 있음을 노래하면서, 전쟁을 통해 체험된 불안함에서 비롯된 좌절감, 상실감을 수미상관의 구조로 심화시키고 있다.


 1연은 세월이 흘러 사랑하던 사람은 가고 없지만, 사랑만은 내 가슴에 남아 있다고 상실의 슬픔을 노래한다. ‘그 눈동자 입술은 그 사람과의 사랑이 정열적이었음을 말한다.


 2,3에서는 화자는 옛날을 돌이켜보며 잊지 못할 추억을 되씹어 보고 있다. ‘바람이 불고 가 오고 세월이 많이 흘러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며, ‘나뭇잎이 떨어지고 그 나뭇잎이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그 사람과의 아픈 추억을 독백체의 담담한 어조로 말하는 듯하다. 여기서 나뭇잎은 지난날의 사랑을 덮는 세월을 의미하는 동시에 과가의 시랑을 한 겹씩 덮으며 겹겹이 쌓여가는 사랑의 아픈 추억을 의미한다.


 이어 4연은 수미 상관으로 화자의 슬픔을 고조시키고, 마지막 5연에 와서 외로움 속에 남은 그대, 즉 상실의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 ‘싸늘한 가슴은 촉각적 이미지로서 허무 의식과 상실의 슬픔이 비장감으로 고조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후일 노래 가사로 널리 소개되었는데, 가 노래로 만들어지게 된 배경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9·28 수복 후, 피란 갔던 문인들이 서울로 돌아왔을 때 박인환 등 문인들은 명동에 둥지를 틀었다. 당시 탤런트 최불암의 모친은 은성(銀星)’이란 술집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박인환 등이 밀린 외상값을 갚지 않은 채 계속 술을 주문하자 술값부터 먼저 갚으라고 요구했다. 이때 박인환이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펜을 들고 종이에다 황급히 써 내려 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은성주인의 슬픈 과거에 관한 시적 표현이었다.


  작품이 완성되자 박인환은 즉시 옆에 있던 작곡가 이진섭(李眞燮)에게 작곡을 부탁하였고,  가까운 곳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가수 현인(玄仁)을 불러다 노래를 부르게 했으며 모든 것이 바로 그 술집 안에서 한순간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 노래를 하던 은성주인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밀린 외상값은 안 갚아도 좋으니 제발 그 노래만은 부르지 말아 달라고 도리어 애원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일화는 명동백작으로 불리던 소설가 이봉구(李鳳九)의 단편 <명동>에 나오는 이야기다.

  모더니즘의 깃발을 높이 들고 전후 폐허의 공간을 술과 낭만으로 누비던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은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연인을 잃고, 살아 있는 사람과 이별했던,  우리들의 아픈 가슴을 다시 한번 울게 했던 화제작이었다.

 

 

박인환(朴寅煥: 1926~ 1956)

 



  1950년대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시인, 강원도 인제 출생,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평양의전을 중퇴. 1946거리, 1947년에 <군상(群像)>을 발표하여 등단하였고, 1947년부터 경향신문 기자로 미국을 시찰하였다.

 

 1949년 동인그룹 '후반기'를 발족하여 활동하는 한편, 1949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하여 본격적인 모더니즘의 기수로 주목받았다. 한국 동란의 황폐를 의식하면서도 도시적인 서정시를 썼다. 1955박인환 시선집을 간행하였고 195630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자택에서 사망. 묘소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다. 1976년에 시집 목마와 숙녀간행되었다.

 

 

 

<해설>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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