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오렌지 / 신동집

by 혜강(惠江) 2020. 3. 13.

 

 

 

 

오렌지

 

 

- 신동집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오렌지는 여기 있는 이대로의 오렌지다.

더도 덜도 아닌 오렌지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을 벗길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찹잘한 속살을 깔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대는 순간

오렌지는 이미 오렌지가 아니고 만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다.

오렌지도 마찬가지 위험한 상태다.

시간이 똘똘

배암의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에

한없이 어진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누구인지 잘은 아직 몰라도. 

 

             - 누가 묻거든(1989)

 

 

<시어 풀이>

 

*​포들한 : 부드럽고 도톰한

*찹잘한 : 차갑고 달착지근한​​

*또아리 : 갈큇발의 다른 끝을 모아 휘감아 잡아맨 부분. ‘똬리의 잘못.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오렌지를 소재로 하여 철학적 인식을 형상화한 시로, 존재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어려운 일임을 말하고 있다.  화자인 는 일상적 사물로서의 오렌지와 본질적 의미로서의 오렌지를 대립적으로 제시하여, 사물의 본질에 가 닿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한편 본질 파악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상징적인 수법을 시용하고 있는 이 작픔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내용을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하고 있으며, 동일한 시구를 반복함으로써 리듬감을 살리며 주제를 강조한다. 또한, 시각, 촉각, 미각 등 다양한 이미지를 사용하여 추상적인 내용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전 6연으로 된 이 주지시의 1연에서는 존재의 의미가 파악되기 이전의 사물로서의 오렌지를 표현하고 있다. ‘내가 보고 있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은 오렌지가 동등한 존재라는 의미이다. 23연은 ''가 인식하는 단순한 외형적 사물로서의 오렌지이다. 그러므로 ''는 오렌지의 껍질을 벗길 수도 속살을 깔 수도 있다. 일상적 차원에서 오렌지에 접근하는 일은 쉽다.

 

  45연은 존재의 본질로서의 오렌지이다. ''가 그를 파악했다고 느끼는 순간, 오렌지는 '손을 댈 수 없는' 주체적 존재로 마주한다. 그만큼 오렌지의 내적 본질을 파악하는 일이 어렵다. ‘그러나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라고 하여 사물의 진정한 의미, 즉 본질을 파악하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는 점을 다시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와 오렌지는 서로를 경계해야 하는 상대적 존재로 대립해 있는 위험한 상태에 있다. 존재의 본질 파악에 대한 절망감을 느끼게 된다. ‘시간이 똘똘/ 배암의 또아리를 틀고 있다.’는 것은 오렌지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는, 무의미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음을 가리킨다. 추상적인 개념을 시각적으로 표현하였다.

 

  6연은 오렌지와 ''의 긴장이 계속된 채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어진 그림자'의 존재를 막연히 감지함으로써 긴장 해소의 예감을 느낀다. ‘한없이 어진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에서 어진 그림자는 본질 파악의 가능성을 내비친 희망적 예감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는 '오렌지'라는 소재를 통해 존재의 본질에 근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 준다. 오렌지의 외면만 보고는 그 본질적 의미를 알 수 없고, 껍질을 벗긴다 해도 본질에 도달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 이미 오렌지의 본질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한계를 느낀 화자는 안타까워하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다. 존재의 본질에 다다갈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작자 신동집(申瞳集,1924~2003)

 

 

  경북 대구에서 출생. 호는 현당(玄堂), 필명은 동집(瞳集), 원명은 동집(東集). 1948년 대학 재학 중 시집 대낮을 간행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집으로 대낮(1948), 서정의 유형(1954), 2의 서시(1958), 모순의 물(1963), 들끓는 모음(1965), 빈 콜라병(1968), 새벽녘의 사랑(1970), 귀환(1971), 송신(1973), 미완의 밤(1976), 해 뜨는 법(1977), 송별(1986), 누가 묻거든.(1989), 백조의 노래(신원문화사, 1990), 고독은 자라(1990) 등 다수 있다.

 

  신동집은 인간의 존재 의식을 추구하는 작품을 통해 문체와 소재의 다양한 실험을 시도함으로써 시의 표현 기교를 증대해 온 대표적 시인이다. 초기에는 휴머니즘에 근거한 주지주의적 경향의 시를, 중기 이후에는 삶에 대한 뜨거운 서정과 철학적 사유가 바탕을 이루는 존재론적 의미를 탐구하는 시를 발표했으며, 서구적인 감각과 동양적인 예지와의 조화를 추구하는 시 세계를 구축했다. 즐거움과 예지를 시적 미학의 기본으로 삼고 있는 작가의 시 세계는 존재(存在)와 무()라는 인간의 근원적 자각에 관한 집요한 탐구를 평이하면서도 깊이 있는 시어를 통해 다원적 은유로 형상화한 것으로 평가된다.

 

 

 

/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문학관련 > - 읽고 싶은 시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지랑이 / 이영도  (0) 2020.03.14
강강술래 / 이동주  (0) 2020.03.14
세월이 가면 / 박인환  (0) 2020.03.13
목마(木馬)와 숙녀(淑女) / 박인환  (0) 2020.03.13
능금 / 김춘수  (0) 2020.03.1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