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인제 박인환문학관 뜰에 있는 '목마'>
목마(木馬)와 숙녀(淑女)
-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木馬)를 타고 떠난 숙녀(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木馬)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少女)는
정원(庭園)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木馬)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女流作家)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燈臺)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意識)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靑春)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人生)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낡은 잡지(雜誌)의 표지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木馬)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박인환 시선집》(1955)
*페시미즘(pessimism) : 염세주의. 세계나 인생을 불행하고 비참한 것으로 보며, 개혁이나 진보는 불가능하다고 보는 경향이나 태도. 낙관주의의 반대 개념
*통속(通俗)하거늘 : 저속하여 일반 대중에게 쉽게 통할 수 있거늘.
▲이해와 감상
이 시는 6·25 전쟁의 체험을 통해 시인이 느낀 문명과 인간에 대한 한없는 절망과 좌절, 그리고 모든 떠나는 것들에 대한 슬픔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시는 '목마'와 '숙녀'로 대표되는 가치 있는 것들이 떠나가는 것에 대한 상실의 정서를 감각적인 시어를 통하여 애상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또한 '~ 해야 한다', ' ~ 할 수밖에 없다'는 표현을 사용하여 절망적인 현실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체념적 태도를 보여 주고 있는데, 이는 6·25 전쟁을 통해 시인이 느낀 절망감과 허무감에서 기인한 것이로, 전후의 허무적 색채가 짙게 깔려있다. 의미보다는 분위기 위주로 진행되고 있으며, 시는 산문체이면서도 경쾌한 리듬감이 느껴진다.
시는 전체 분위기에 따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부분(1~11행)에서는 떠나가는 것들에 대한 화자의 슬픔을 말하고 있다.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부정적 의미의 서술어와 결합함으로써 화자가 마주 선 허무와 절망을 보여 주면서 시의 감상적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이 부분에서 ‘술,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 목마, 술병, 상심한 별’ 등의 시어는 허무와 절망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두 번째 부분(12~25행)은 절망적 현실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해야 한다'는 당위적 종결법을 반복하고 있지만, 그것은 당위나 결단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절망적 현실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체념에 가깝다. 이는 작가가 현실에서는 더 이상 삶의 지표를 찾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에서 기인한 것으로, 극한적인 절망과 비애의 감정 표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에서 ‘등대’는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등대로>에서 인용한 것으로 ‘삶의 목표’를 리키는 것인데, ‘불’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삶의 목표가 상실되어 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개의 틈’은 ‘희미한 의식’으로 표현된 삶의 의욕과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 사이에서 잠시 갈등하지만 결국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며 자포자기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마지막 부분(26~32행)은 절망적 현실과 인생에 대한 페시미즘적인 태도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부분적으로 시적 화자가 인생을 돌아보고, 체념적 상황에 대해 반성하기도 하지만, 그가 삶에 대해 갖고 있는 절망적 태도는 벗어날 수 없다.
결국, 이 시의 화자는 순수했던 삶의 표상인 ‘목마’와 그것을 타고 떠나버린 ‘숙녀’를 보내고 절망과 허무에 빠져 ‘술’을 마신다. 이 시의 제목이자 중심 소재인 ‘목마’와 ‘숙녀’는 시 전체의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역할을 하며, 절망적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떠날 수밖에 없는 지난 시대의 소중한 가치들을 상징한다.
즉, ‘목마’는 땅에 내려오지 못한 채 헛된 발길질만을 계속하며 제자리를 반복해서 맴돌 뿐이다. 그래서 이 시에서 '목마'는 현실에 정착하지 못하고 허공을 헤맬 수밖에 없는 인간의 슬픈 운명을 상징한다. 또, 때 묻지 않은 순수와 정결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숙녀'는 미숙함 때문에 더럽고 추악한 이 세상에 발을 내려놓자마자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이 시에서 '숙녀'는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이 암시하는 것처럼, 과거에는 화자의 삶의 중심에 있으면서 삶의 좌표 구실을 했으나 지금은 떠나가 찾을 수 없는 사람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 곧 '사랑의 사람'이 겪은 슬픈 삶의 모습을, 절망과 허무로 당대 현실과 불화하다 자살하고 만 버지니아 울프의 슬픈 생애와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 시에서 '목마'와 '숙녀'는 이 시 전체의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매개체로, 절망적 현실에 삶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떠나갈 수밖에 없는, 지난 시대의 아름답고 소중한 가치들을 상징한다.
▲작자 박인환(朴寅煥,1926~1956)
시인. 강원 인제 출생. 1946년 《국제신문》에 <거리>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1949년 김수영·김경란 등과 함께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라는 5인 공동 시집을 발간하여 모더니즘 시 운동의 주역이 되었다. 전후에는 죽어가는 모든 것에 대한 슬픔을 허무와 절망의 시각으로 그려 냈다. 시집으로 《박인환 시선집》(1955)이 있다.
/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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