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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767

고향 소식 / 박재삼 고향 소식 - 박재삼 아, 그래, 건재약(乾材藥) 냄새 유달리 구수하고 그윽하던 한냇가 대실 약방‥‥‥ 알다 뿐인가 수염 곱게 기르고 풍채 좋던 그 노인께서 세상을 떠났다고? 아니, 그게 벌써 여러 해 됐다고? 그리고 조금 내려와서 팔포(八浦) 웃동네 모퉁이 혼자 늙으며 술장사하던 사량(蛇梁)섬 창권(昌權)이 고모, 노상 동백기름을 바르던 아, 그분 말이라, 바람같이 떴다고? 하기야 사람 소식이야 들어 무얼 하나, 끝내는 흐르고 가고 하게 마련인 것을…… 그러나 가령 둔덕에 오르면 햇빛과 바람 속에서 군데 군데 대밭이 아직도 그전처럼 시원스레 빛나며 흔들리고 있다든지 못물이 먼 데서 그렇다든지 혹은 섬들이 졸면서 떠 있다든지 요컨대 그런 일들이 그저 내 일같이 반갑고 고맙고 할 따름이라네. ▲이해와 감상.. 2020. 3. 25.
겨울나무를 보며 / 박재삼 겨울나무를 보며 - 박재삼 스물 안팎 때는 먼 수풀이 온통 산발을 하고 어지럽게 흔들어 갈피를 못 잡는 그리움에 살았다. 숨 가쁜 나무여 사랑이여. 이제 마흔 가까운 손등이 앙상한 때는 나무들도 전부 겨울나무 그것이 되어 잎사귀들을 떨어내고 부끄럼 없이 시원하게 벗을 것을 벗어 버렸다. 비로소 나는 탕에 들어앉아 그것들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기쁘게 다가오고 있는 것 같음을 부우연 노을 속 한 경치로써 조금씩 확인할 따름이다. ◎시어 풀이 산발(散髮) : 머리를 풀어 헤침. 또는 그 머리. 탕(湯) : 목욕탕이나 온천 등의 목욕하는 곳. ▲이해와 감상 이 시는 고뇌하던 젊은 시절과 중년의 삶을 ‘나무’라는 자연물에 대응시켜 노래하고 있는 서정시이다. 즉 화자인 ‘나’는 탕에 들어가 앉아 여름 나무와 겨.. 2020. 3. 25.
수정가(水晶歌) / 박재삼 수정가(水晶歌) - 박 재 삼 집을 치면, 정화수(井華水) 잔잔한 위에 아침마다 새로 생기는 물방울의 선선한 우물집이었을레. 또한 윤이 나는 마루의, 그 끝에 평상의, 갈앉은 뜨락의, 물 냄새 창창한 그런 집이었을레. 서방님은 바람 같단들 어느 때고 바람은 어려올 따름, 그 옆에 순순(順順)한 스러지는 물방울의 찬란한 춘향이 마음이 아니었을레. 하루에 몇 번쯤 푸른 산 언덕들을 눈 아래 보았을까나. 그러면 그때마다 일렁여 오는 푸른 그리움에 어울려 흐느껴 물살 짓는 어깨가 얼마쯤 하였을까나. 진실로, 우리가 받들 산신령은 그 어디 있을까마는, 산과 언덕들의 만 리 같은 물살을 굽어보는, 춘향은 바람에 어울린 수정(水晶) 빛 임자가 아니었을까나. - 출전 《춘향이 마음》(1962) ◎시어 풀이 *정화수(井.. 2020. 3. 24.
흥부 부부상(夫婦像) / 박재삼 흥부 부부상(夫婦像) - 박재삼 흥부 부부가 박덩이를 사이하고 가르기 전에 건넨 웃음살을 헤아려 보라. 금이 문제리, 황금 벼 이삭이 문제리, 웃음의 물살이 반짝이며 정갈하던 그것이 확실히 문제다. 없는 떡방아 소리도 있는 듯이 들어내고 손발 닳은 처지끼리 같이 웃어 비추던 거울 면(面)들아. 웃다가 서로 불쌍해 서로 구슬을 나누었으니. 그러다 금시 절로 면에 온 구슬까지를 서로 부끄리며 먼 물살이 가다가 소스라쳐 반짝이듯 서로 소스라쳐 본 웃음 물살을 지었다고 헤아려 보라. 그것은 확실히 문제다. - 출전 《춘향이 마음》(1962) ◎시어 풀이 정갈하던 : 모양이나 옷 따위가 깨끗하고 말쑥하던. 부끄리며 : 부끄러워하며.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고전 소설 을 모티프로 하여 가난한 삶 속에서도 웃음을 .. 2020. 3. 24.
추억에서 / 박재삼 추억에서 - 박재삼 진주(晋州) 장터 생어물전(生魚物廛)에는 바다 밑이 깔리는 해 다 진 어스름을, 울 엄매의 장사 끝에 남은 고기 몇 마리의 빛 발(發)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 은전(銀錢)만큼 손 안 닿는 한(恨)이던가 울 엄매야 울 엄매, 별밭은 또 그리 멀리 우리 오누이의 머리 맞댄 골방 안 되어 손 시리게 떨던가 손 시리게 떨던가, 진주(晋州) 남강(南江) 맑다 해도 오명 가명 신새벽이나 밤빛에 보는 것을, 울 엄매의 마음은 어떠했을꼬,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이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인가. - 출전 《춘향이 마음》(1962) ◎시어 풀이 생어물전 : 생선을 파는 가게. 울 엄매 : ‘우리 엄마’의 경상도 사투리. 은전 : 은으로 만든 돈. 신새벽 : 아주 이른 새벽. 옹기전 : 옹기그릇을.. 2020. 3. 24.
울음이 타는 가을 강 / 박재삼 울음이 타는 가을 강 - 박재삼 ​ ​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 《춘향이 마음》(1962)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노을이 물든 가을 강을 바라보면서 애상감에 젖는 화자를 통해 인생의 유한성으로 인한 서러움과 한(恨)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은 노을에 물든 강을 본 화자가.. 2020. 3. 23.
연시(軟枾) / 박용래 연시(軟柹) - 박용래 여름 한낮 비름잎에 꽂힌 땡볕이 이웃 마을 돌담 위 연시로 익다 한쪽 볼 서리에 묻고 깊은 잠 자다 눈 오는 어느 날 깨어나 제상 아래 심지 머금은 종발로 빛나다 제상(祭床) : ‘제사상’의 준말 종발 : 중발보다 작고 종지보다 조금 넓고 평평한 그릇. ▲이해와 감상 이 시는 감이 한여름의 땡볕에 붉어지고 가을 서리에 익어 눈 오는 겨울 어느 날 밤 제상(祭床)에 오르는 과정을 그리면서, 연시의 충만한 생명력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형상화한 작품이다. 시인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감을 통해 자연의 순리를 관조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단 2개의 문장을 총 14행으로 배열하여 전체적으로 언어의 절제와 표현의 간결성을 추구하여 압축미를 확보했다. 전반부 문장의 주어는 ‘땡볕’, 서술.. 2020. 3. 23.
울타리 밖 / 박용래 울타리 밖 - 박용래 머리가 마늘쪽같이 생긴 고향의 소녀와 한여름을 알몸으로 사는 고향의 소년과 같이 낯이 설어도 사랑스러운 들길이 있다. 그 길에 아지랑이가 피듯 태양이 타듯 제비가 날 듯 길들 따라 물이 흐르듯 그렇게 그렇게 천연(天然)히 울타리 밖에도 화초를 심는 마을이 있다 오래오래 잔광(殘光)이 눈부신 마을이 있다 밤이면 더 많이 별이 뜨는 마을이 있다 - 시집 《강아지풀》(1975) 천연(天然)히 : 생긴 그대로 조금도 꾸밈이 없이. 잔광(殘光) : 해가 질 무렵의 약한 햇빛. ▲이해와 감상 이 시는 고향 마을의 ‘울타리 밖’ 정경을 통해 ‘울타리’ 안은 물론 ‘울타리 밖’에도 자연과 인간이 조화(調和)를 이루어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드러낸 작품이다. 이 시 역시 박용래 시인의 시 세계를 .. 2020. 3. 23.
꽃물 / 박용래 꽃물 -박용래 ​ 수수밭 수수밭 사이로 기우는 고향 가까운 산자락 보릿재 내는 사람들 귀향 열차 뒤칸에 매달린 노을, 맨드라미 꽃물. - 출전 《강아지풀》(1975)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귀향(歸鄕) 열차를 타고 가면서 본, 고향 근처의 풍경과 고향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간결한 시어와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감각적으로 묘사한 시이다. 화자는 ‘고향 가까운 산자락’과 ‘보릿재 내는 사람들’을 드러냄으로써 고향에 대한 애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편, 다른 시와는 다르게 군더더기 없이 시행을 간결하게 배열하여 간결미를 보여주고 있으며, 시선의 이동(수수밭→산자락→사람들→노을)에 따라 시상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시인은 열차를 타고 고향으로 가고 있다. 그리움을 안고 가는 열차는 어느덧 수수.. 2020. 3. 23.
구절초(九節草) / 박용래 구절초(九節草) - 박용래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구절초 매디매디 나부끼는 사랑아 내 고장 부소산 기슭에 지천으로 피는 사랑아 뿌리를 달여서 약으로도 먹던 기억... 여학생이 부르면 마아가렛 여름 모자 차양이 숨었는 꽃 단춧구멍에 달아도 머리핀 대신 꽂아도 좋을 사랑아 여우가 우는 秋分(추분) 도깨비불이 스러진 자리에 피는 사랑아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매디매디 눈물 비친 사랑아. - 시집 《백발의 꽃대궁》 (문학예술사, 1979) ▲이해와 감상 구절초는 가을 내내 우리의 산야 어디를 가도 볼 수 있는 꽃이다. 음력 9월 9일(중양절인 어제)이면 아홉 마디가 되어 꽃을 채취한다 해서 구절초라 불렸다. 구절초는 꽃대 하나에 꽃 하나만 피우고 희거나 엷은 분홍색을 띤다. 흰 꽃잎이 신선보다 더 돋보인다고.. 2020. 3. 23.
<저녁 눈>과 <겨울밤> / 박용래 A. 저녁 눈 - 박용래 ​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 만 다니며 붐비다 *말집 : 추녀가 사방으로 뺑 돌아가게 만든 집. B. 겨울밤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 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 집 추녀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 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 《월간문학》(1966) ▲이해와 감상 위의 두 작품은 모두 박용래의 작품으로, 전원적·향토적 서정의 세계를 언어의 군더더기를 배제하여 압축의 묘미를 보여주는 그의 시 세계를 잘 드러낸 작품이다. 또 이 두 작품은 고유어만을 사용하.. 2020. 3. 22.
월훈(月暈) / 박용래 월훈(月暈) - 박용래 첩첩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습니다. 잎 진 사잇길, 저 모래 둑, 그 너머 강기슭에서도 보이진 않습니다. 허방다리 드러내면 보이는 마을. 갱(坑) 속 같은 마을. 꼴깍, 해가, 노루꼬리 해가 지면 집집마다 봉당에 불을 켜지요. 콩깍지, 콩깍지처럼 후미진 외딴집, 외딴집에도 불빛은 앉아 이슥토록 창문은 모과(木瓜) 빛입니다. 기인 밤입니다. 외딴집 노인은 홀로 잠이 깨어 출출한 나머지 무를 깎기도 하고 고구마를 깎다, 문득 바람도 없는데 시나브로 풀려 풀려 내리는 짚단, 짚오라기의 설레임을 듣습니다. 귀를 모으고 듣지요. 후루룩 후루룩 처마깃에 나래 묻는 이름 모를 새, 새들의 온기를 생각합니다. 숨을 죽이고 생각하지요. 참 오래오래, 노인의 자리맡에 밭은 기침 소리도 없을 양.. 2020. 3. 22.
휴전선(休戰線) / 박봉우 휴전선(休戰線) - 박 봉 우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저어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 아름다운 풍토는 이미 고구려 같은 정신도 신라 같은 이야기도 없는가.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인데…… 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의 의미는 여기에 있었던가. 모든 유혈(流血)은 꿈같이 가고 지금도 나무 하나 안심하고 서 있지 못할 광장. 아직도 정맥은 끊어진 채 휴식인가 야위어가는 이야기뿐인가. 언제 한 번은 불고야 말 독사의 혀같이 징그러운 바람이여. 너도 이미 아는 모진 겨우살이를 또 한 번 겪으라는가 아무런 죄도 없이 피어난 꽃은 시방의 자리에서 얼마를 더 살아야 하는.. 2020. 3. 22.
나비와 철조망 / 박봉우 나비와 철조망 - 박봉우 지금 저기 보이는 시푸런 강과 또 산을 넘어야 진종일은 별일없이 보낸 것이 된다. 서녘 하늘은 장미빛 무늬로 타는 큰 눈의 창을 열어… 지친 날개를 바라보며 서로 가슴 타는 그러한 거리(距離)에 숨이 흐르고 모진 바람이 분다. 그런 속에서 피비린내 나게 싸우는 나비 한 마리의 생채기. 첫 고향의 꽃밭에 마즈막까지 의지하려는 강렬한 바라움의 향기였다. 앞으로도 저 강을 건너 산을 넘으려면 몇 '마일'은 더 날아야 한다. 이미 그 날개 피에 젖을 대로 젖고 시린 바람이 자꾸 불어간다. 목이 바싹 말라 버리고 숨결이 가쁜 여기는 아직도 싸늘한 적지(敵地). 벽, 벽…… 처음으로 나비는 벽이 무엇인가를 알며 피로 적신 날개를 가지고도 날아야만 했다. 바람은 다시 분다. 얼마쯤 날으면 아.. 2020. 3. 21.
강원도 돌 / 마종기 강원도의 돌 - 마종기 나는 수석(水石)을 전연 모르지만 참 이쁘더군, 강원도의 돌. 골짜기마다 안개 같은 물 냄새 매일을 그 물소리로 귀를 닦는 강원도의 그 돌들, 참, 이쁘더군. 세상의 멀고 가까움이 무슨 상관이리. 물속에 누워서 한 백 년, 하늘이나 보면서 구름이나 배우고 돌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더군. 참, 이쁘더군, 말끔한 고국(故國)의 고운 이마, 십일월에 떠난 강원도의 돌. - 마종기 시집 《그 나라 하늘빛》(1991) ▲이해와 감상 자연은 언제나 우리에게 몸과 마음을 쉴 수 있는 안식처를 제공한다. 이 시는 ‘강원도의 돌’을 바라보며 세속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누리는 맑고 깨끗한 삶에 대한 소망과 고국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작품이다. 1999년에 발표된 마종기의 이 작품은 미국에서 .. 2020. 3. 21.
거산호(居山好) 2 / 김관식 거산호(居山好) 2 - 김관식 오늘, 북창을 열어 장거릴 등지고 산을 향하여 앉은 뜻은 사람은 맨날 변해 쌓지만 태고로부터 푸르러 온 산이 아니냐. 고요하고 너그러워 수(壽)하는 데다가 보옥(寶玉)을 갖고도 자랑 않는 겸허한 산. 마음이 본시 산을 사랑해 평생 산을 보고 산을 배우네. 그 품 안에서 자라나 거기에 가 또 묻히리니 내 이승의 낮과 저승의 밤에 아아(峨峨)라히 뻗쳐 있어 다리 놓는 산. 네 품이 고향인 그리운 산아 미역취 한 이파리 상긋한 산 내음새 산에서도 오히려 산을 그리며 꿈 같은 산 정기(精氣)를 그리며 산다. - 《창작과 비평》”(1970) 장거리 : 장이 서는 거리, 세속적인 삶의 공간 수(壽)하는 : 오래 사는 보옥(寶玉) : 보석 아아(峨峨)라히 : 산이나 큰 바위가 험할 정도.. 2020. 3. 21.
거산호 I - 경가도어(耕稼陶漁)의 시 / 김관식 거산호 I -경가도어(耕稼陶漁)의 시 - 김관식 산(山)에 가 살래 팥밭을 일궈 곡식(穀食)도 심구고 질그릇이나 구워 먹고 가끔, 날씨 청명(淸明)하면 동해(東海)에 나가 물고기 몇 놈 데리고 오고 작록(爵祿)도 싫으니 산에 가 살래 -《창작과 비평》(1970) 작록(爵祿) : 관작(官爵)과 봉록(俸祿)을 아울러 이르는 말.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세속을 떠나 산에 가서 소박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을 장난기 어린 말투로 노래하고 있다. 이 시의 제목 ‘거산호(居山好)’는 ‘산에 사는 것을 좋아한다’라는 의미이며, 시의 부제는 ‘경가도어(耕稼陶漁)의 시’로 되어 있다. ‘경가도어(耕稼陶漁’라는 말은 ‘맹자(孟子)’에 전하는 말로, ‘밭을 일궈(耕), 씨를 뿌리고(稼), 스스로 질그릇을 구워 쓰고(陶), 낚.. 2020. 3. 21.
꽃의 말 / 황금찬 꽃의 말 황금찬 사람아 입이 꽃처럼 고아라 그래야 말도 꽃같이 하리라 사람아 …… - 《누른 빛깔》(대표 시인 10인선)(2009)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거친 말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보다는 서로가 아름다운 말을 나누어 세상이 좀 더 아름다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짧은 형식을 통해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화자는 ‘입’을 ‘꽃’에 비유하여 아름다운 말을 사용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화자는 특정인이 아닌 ‘사람’을 청자로 설정하여, 사람이 아름다운 꽃과 같이 아름다운 말씨와 태도로 상대를 배려하며 대하기를 바라고 있다. 나아가 아름다운 말을 사용하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5행 9음절, 25자의 짧은 시는 상대방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을 통해 시상을 전개하고 있으며, 직유와 명령형을 사용하여 .. 2020. 3. 20.
파랑새 / 한하운 파랑새 - 한하운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 출전 《보리피리》(1955)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천형(天刑, 하늘이 내린 형벌)이라는 나병(癩病)으로 인해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았던 한하운(韓何雲) 시인이 자유로운 삶에 대한 소망을 노래한 작품이다. 시의 핵심어인 ‘파랑새’는 실제 나병 환자였던 시인이 자신의 처지를 서글퍼하며, 파랑새가 되어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싶은 소망을 토로하고 있다. 따라서 파랑새는 희망과 자유로움, 이상과 동경을 나타낸다. 이 시는 매우 쉬운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시적 화자가 소망하는 자유로운 삶에 대한 절실함과 나병 환자로서 겪어야 했던 한스러움이 그 .. 2020. 3. 20.
전라도길 - 소록도(小鹿島)로 가는 길 / 한하운 전라도길 - 소록도(小鹿島)로 가는 길 - 한하운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天安)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西山)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千里), 먼 전라도 길. - 《신천지》(1949.4) 지까다비 : 노동자용의 작업화(일본어), 일할 때 신는 일본식 운동화 ▲이해와 감상 ​ 이 시는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49년 《'신천지》 4월호에 발표된 12편의 작품 중의 하나로서 이 시의 부제(副題)는 '소록도로 가는 길'.. 2020. 3. 20.
보리피리 / 한하운 보리피리 - 한하운​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靑山) 어린 때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人寰)의 거리 인간사(人間事)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 ― ㄹ 닐니리 - 제2시집 《보리피리》(1955) ​* 인환(人寰) : 인간의 세계 * 기산하(幾山河) : 산하가 그 몇 해인가 ▲이해와 감상 이 시는 화자의 한 맺힌 삶을 애절한 피리 소리에 담아 표현함으로써,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나병 환자로서 방황하는 삶의 서러움을 아름다운 서정으로 극복한 작품이다. 작품에 나타난 ‘보리피리’는 화자의 정서가 집약적으로 드러난 소재로, 화자는 보리피리 소리를 통해 ‘고향’과 ‘어린 때’, .. 2020. 3. 19.
의자(椅子) / 조병화 의자(椅子) - 조병화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지요.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어요.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주듯이.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습니다. - 제13시집 《시간의 숙소를 더듬어서》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조병화의 제13 시집 《시간의 숙소를 더듬어서》에 수록된 연작시 의 열 편 중에 일곱 번째 시이다. 이 시는 시대와 사회의 주역이 되는 자리를 의미하는 '의자'를 통해서 세대교체(世代交替)의 필요성과 역사 연계의식(連繫意識)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작품이다. 이 시에서 `의자'는 일상적이며 .. 2020. 3. 19.
가을에 / 정한모 가을에 - 정한모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으며 가볍게 가을을 날으고 있는 나뭇잎 그렇게 주고받는 우리들의 반작이는 미소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주십시오 흔들리는 종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 엄마의 치마 곁에 무릎을 꿇고 모아쥔 아기의 작은 손아귀 안에 당신을 찾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어제 오늘이 마침낸 전설 속에 묻혀버리는 해저(海底) 같은 그날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달에는 은도끼로 찍어낼 계수나무가 박혀 있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영원히 아름다운 진리임을 오늘도 믿으며 살고 싶습니다 어렸을 적에 불같이 끓던 병상에서 한없이 밑으로만 떨어져 가던 그토록 아득하던 추락(墜落)과 그 속력으로 몇 번이고 까무러쳤던 그런 공포의 기억이 진리라는 이 무서운 진리로.. 2020. 3. 19.
나비의 여행 – 아가의 방(房) / 정한모 나비의 여행 – 아가의 방(房) - 정한모 아가는 밤마다 길을 떠난다 하늘하늘 밤의 어둠을 흔들면서 수면(睡眠)의 강을 건너 빛 뿌리는 기억의 들판을, 출렁이는 내일의 바다를 날으다가 깜깜한 절벽, 헤어날 수 없는 미로에 부딪치곤 까무라쳐 돌아온다 한 장 검은 표지를 열고 들어오면 아비규환(阿鼻叫喚)하는 화약(火藥) 냄새 소용돌이. 전쟁은 언제나 거기서 그냥 타고 연자색 안개의 베일 속 파란 공포의 강물은 발길을 끊어버리고 사랑은 날아가는 파랑새 해후(邂逅)는 언제나 엇갈리는 초조 그리움은 꿈에서도 잡히지 않는다 꿈에서 지금 막 돌아와 꿈의 이슬에 촉촉이 젖은 나래를 내 팔 안에서 기진맥진 접는 아가야! 오늘은 어느 사나운 골짜기에서 공포(恐怖)의 독수리를 만나 소스라쳐 돌아왔느냐. - 《사상계》(196.. 2020. 3. 18.
바다 2 / 정지용 바다 2 - 정지용 바다는 뿔뿔이 달어나려고 했다. 푸른 도마뱀 떼같이 재재발랐다. 꼬리가 이루 잡히지 않았다. 흰 발톱에 찢긴 산호(珊瑚)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 가까스로 몰아다 붙이고 변죽을 둘러 손질하여 물기를 씼었다. 이 앨쓴 해도(海圖)에 손을 씻고 떼었다. 찰찰 넘치도록 돌돌 구르도록 화동그라니 받쳐들었다. 지구는 연잎인 양 오므라들고……펴고…… - 《시원(詩苑)》(1935) 재재발랐다 : 재잘재잘 수다스러워 어수선하면서도 즐겁고 유쾌한 느낌이 있었다. 이루 : 여간하여서는 도저히 변죽 : 그릇이나 과녁 따위의 가장자리 앨쓴 : 애를 쓴 회동그라니 : 둥글게, 아주 동그라니 ▲이해와 감상 이 시는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며 생동감 넘치는 바다의 모습을 그려낸 작품으로, 파도가 밀려오는 푸른 바다.. 2020. 3. 18.
비 / 정지용 비 - 정지용 돌에 그늘이 차고, 따로 몰리는 소소리 바람. 앞섰거니 하야 꼬리 치날리어 세우고, 종종 다리 까칠한 산(山)새 걸음걸이. 여울 지어 수척한 흰 물살, 갈갈이 손가락 펴고. 멎은 듯 새삼 돋는 빗낱 붉은 잎 잎 소란히 밟고 간다. - 《백록담》 23호(1941) 소소리 바람 : 갑자기 부는 스산한 바람 여울 : 강이나 바다에서 물살이 세고 빠르게 흐르는 부분. 갈갈히 : 갈래갈래. 돋는 : 떨어지는. 낯 : ‘낱’의 옛말. 셀 수 있는 사물의 하나하나를 가리키는 말. 소란히 : 어수선하고 시끄럽게.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비가 내리는 자연 현상을 섬세하고 감각적인 묘사를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는 비 오기 직전부터 물줄기를 이루어 흐를 때까지의 과정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하고 있.. 2020. 3. 17.
춘설(春雪) / 정지용 춘설(春雪) - 정지용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우수절(雨水節) 들어 바로 초하루 아침 새삼스레 눈이 덮인 뫼 뿌리와 서늘하고 빛난 이마받이하다 얼음 금 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 고름 절로 향기로워라 웅숭거리고 살아난 양이 아아 꿈같기에 설어라 미나리 파릇한 새순 돋고 옴짓 아니 기던 고기 입이 오물거리는 꽃 피기 전 철 아닌 눈이 핫옷 벗고 도로 춥고 싶어라 - 《문장》(1939) 우수절(雨水節) : 입춘과 경칩 사이의 절기, ‘봄비로 물기운이 가득한 때’(양력 2월 18일경). 멧부리 : 산등성이나 산봉우리의 가장 높은 꼭대기. 이마받이 : ① 이마로 부딪침. ② 두 물체가 몹시 가깝게 맞붙음. 옹송그리고 : 춥거나 두려워 몸을 궁상맞게 몹시 움츠려 작게 하고. 핫옷 : 솜을 두어.. 2020. 3. 17.
조찬(朝餐) / 정지용 조찬(朝餐) - 정지용 해ㅅ살 피어 이윽한 후, 머흘머흘 골을 옴기는 구름. 길경(桔梗) 꽃봉오리 흔들려 씻기우고, 차돌부리 촉 촉 죽순(竹筍) 돋듯. 물소리에 이가 서리다. 앉음새 갈히여 양지 쪽에 쪼그리고, 서러운 새 되어 흰 밥알을 쫏다. - 《문장》(1941) 조찬(朝餐) : 아침 식사 이윽한 : 이슥한, 시간이 지난 머흘머흘 : 구름이 뭉게뭉게 낀 모양 길경(桔梗) : 도라지 갈히여 : 가리어.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문장》(1941)에 발표하였으며, 시집 《백록담》에 수록되어 있는 시로, 비 온 뒤의 아침 풍경을 바라보며 아침밥을 먹는 자신의 서러운 모습을 형상화한 관조적이며 애상적인 작품이다. 화자는 한편의 동양화 같은 풍경 묘사와 정제된 시어를 통해 여백(餘白)의 미를 드러내고 있으며,.. 2020. 3. 17.
인동차(忍冬茶) / 정지용 인동차(忍冬茶) - 정지용 노주인(老主人)의 장벽(腸壁)에 무시(無時)로 인동(忍冬) 삼긴 물이 나린다. 자작나무 덩그럭 불이 도로 피어 붉고, 구석에 그늘 지어 무가 순 돋아 파릇하고, 흙 냄새 훈훈히 김도 사리다가 바깥 풍설(風雪) 소리에 잠착하다. 산중(山中)에 책력(冊曆)도 없이 삼동(三冬)이 하이얗다. - 《문장》(1941) 인동차 : 인동덩굴의 꽃과 잎을 넣어 끓인 차. 장벽(腸壁) : 내장의 벽, 즉 창자 벽 삼긴 : 삶아진. 물에 넣고 끓여진. ‘삶다’의 피동사 ‘삶기다(삼기다)’의 관형사형 인동(忍冬) : 겨울을 견디다. 무시(無時)로 : 특별히 정한 때가 없이 아무 때나. 삼긴 : 삶긴. 물에 삶아 우려낸. 덩그럭 불 : 장작의 다 타지 않은 덩어리에 붙은 불. 사리다가 : 서리다가 잠.. 2020. 3. 17.
장수산1 / 정지용 장수산1                                         - 정지용       벌목정정(伐木丁丁)이랬거니 아람도리 큰 솔이 베혀짐즉도 하이 골이 울어 멩아리 소리 쩌르렁 돌아옴즉도 하이 다람쥐도 좇지 않고 묏새도 울지 않어 깊은 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데 눈과 밤이 조히보담 희고녀!  달도 보름 기달려 흰 뜻은 한밤 이 골을 걸음이랸다? 웃절 중이 여섯 판에 여섯 번 지고 웃고 올라간 뒤 조찰히 늙은 사나히의 남긴 내음새를 줏는다? 시름은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우노니 오오 견디랸다. 차고 올연(兀然)히 슬픔도 꿈도 없이 장수산 속 겨울 한밤내 ― .                                         - 《문장》(1939)  시어 풀이> .. 2020. 3.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