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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767

날랜 사랑 / 고재종 날랜 사랑 - 고재종 장마 걷힌 냇가 세찬 여울물 차고 오르는 은피라미 떼 보아라 산란기 맞아 얼마나 좋으면 혼인색(婚姻色)으로 몸단장까지 하고서 좀 더 맑고 푸른 상류로 발딱발딱 배 뒤집어 차고 오르는 저 날씬한 은백의 유탄(流彈)에 푸른 햇발 튀는구나 오호, 흐린 세월의 늪 헤쳐 깨끗한 사랑 하나 닦아 세울 날랜 연인아 연인들아 - 시집 《날랜 사랑》 (1995) ◎시어 풀이 혼인색 : 양서류·조류·어류 등의 동물에서, 번식기에 나타나는 피부의 빛깔 유탄(流彈) : 빗나간 탄환. ▲이해와 감상 이 시는 봄날 산란기를 맞아 수면 위로 뛰어올라 여울물을 차고 상류로 올라가는 은피라미 떼의 역동적인 생명력에 대한 예찬을 감각적인 시어를 사용하여 효과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1연은 은피리미 떼의 생명력과 아.. 2020. 4. 11.
성숙 / 고재종 성숙 - 고재종 바람의 따뜻한 혀가 사알작, 우듬지에 닿기만 해도 갱변의 미루나무 그 이파리들 짜갈짜갈 소리날 듯 온통 보석 조각으로 반짝이더니 바람의 싸늘한 손이 씽 씨잉, 싸대기를 후리자 갱변의 미루나무 그 이파리들 후둑후두둑 굵은 눈물방울로 온통 강물에 쏟아지나니 온몸이 떨리는 황홀과 온몸이 떨리는 매정함 사이 그러나 미루나무는 그 키 한두 자쯤이나 더 키우고 몸피 두세 치나 더 불린 채 이제는 바람도 무심한 어느 날 저 강 끝으로 정정한 눈빛도 주거니 애증의 이파리 모두 떨구고 이제는 제 고독의 자리에 서서 남빛 하늘로 고개 들 줄도 알거니 - 시집 《날랜 사랑》(1995년) ◎시어 풀이 우듬지 : 나무의 꼭대기 줄기 정정한 : 반짝반짝 빛나는 애증 : 사랑과 미움 ▲이해와 감상 1995년에 발표.. 2020. 4. 11.
성묘 / 고은 성묘 - 고은 아버지,남북 통일이 되지 않았습니다. 일제 시대 소금 장수로 이 땅을 떠도신 아버지. 아무리 아버지의 두만강 압록강을 생각해도 눈 앞에 선지가 생길 따름입니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 두만강의 회령 수양버들을 보셨지요. 그리고 아버지는 모든 남북의 마을을 다니시면서 하얀 소금을 한 되씩 팔았습니다. 때로는 서도(西道) 노래도 흥얼거리고 꽃 피는 남쪽에서는 남쪽이라 밀양 아리랑도 흥얼거리셨지요. 한마디로, 세월은 흘러서 멈추지 않는 물인지라 젊은 아버지의 추억은 이 땅에 남지 않고 아버지는 하얀 소금이 떨어져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 남북통일이 되면 또 다시 이 땅에 태어나서 남북을 떠도는 청청한 소금 장수가 되십시오. "소금이여", "소금이여" 그 소리, 멀어져 가는 그 소리를 듣게 하십시오.. 2020. 4. 11.
머슴 대길이 / 고은 머슴 대길이 - 고은 새터 관전이네 머슴 대길이는 상머슴으로 누룩도야지 한 마리 번쩍 들어 도야지 우리에 넘겼지요. 그야말로 도야지 멱따는 소리까지도 후딱 넘겼지요. 밥 때 늦어도 투덜댈 줄 통 모르고 이른 아침 동네길 이슬도 털고 잘도 취워 훤히 가리마 났지요. 그러나 낮보다 어둠에 빛나는 먹눈이었지요. 머슴 방 등잔불 아래 나는 대길이 아저씨한테 가갸거겨 배웠지요. 그리하여 장화홍련전을 주룩주룩 비 오듯 읽었지요. 어린아이 세상에 눈 떴지요. 일제 36년 지나간 뒤 가갸거겨 아는 놈은 나밖에 없었지요. 대길이 아저씨더러는 주인도 동네 어른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지요. 살구꽃 핀 마을 뒷산에 올라가서 홑적삼 큰아기 따위에는 눈요기도 안하고 지게 작대기 뉘어 놓고 먼데 바다를 바라보았지요. 나도 따라 바라.. 2020. 4. 10.
선제리 아낙네들 / 고은 선제리 아낙네들 - 고은 먹밤중 한밤중 새터 중뜸 개들이 시끌짝하게 짖어댄다 이 개 짖으니 저 개도 짖어 들 건너 갈뫼 개까지 덩달아 짖어댄다 이런 개 짖는 소리 사이로 언뜻언뜻 까 여 다 여 따위 말끝이 들린다 밤 기러기 드높게 날며 추운 땅으로 떨어뜨리는 소리하고 남이 아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의좋은 그 소리하고 남이 아니다 콩밭 김칫거리/ 아쉬울 때 마늘 한 접 이고 가서 군산 묵은 장 가서 팔고 오는 선제리 아낙네들 팔다 못해 파장 떨이로 넘기고 오는 아낙네들 시오릿길 한밤중이니/ 십리길 더 가야지 빈 광주리야 가볍지만 빈 배 요기도 못하고 오죽이나 가벼울까 그래도 이 고생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못난 백성/ 못난 아낙네 끼리끼리 나누는 고생이라 얼마나 의좋은 한세상이더냐 그들의 말소리에 익숙한지 .. 2020. 4. 10.
눈길 / 고은 눈길 - 고은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떠들고 와 여기 있는 낯선 지역을 바라보노라 나의 마음속에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 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 지나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로서 덮이노라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 내리는 하늘은 무엇인가 내리는 눈 사이로 귀 기울여 들리나니 대지(大地)의 고백(告白)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 안에서는 어둠이노라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적막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 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 출처 《현대문학》(1958) ▲이해와 감상 이 시는 '눈 덮인 길'을 통해, 방황과 고통의 삶을 살아왔던 시적 화자가 눈 덮인 길을 바라보며 내면 의식이 .. 2020. 4. 10.
사랑법 / 강은교 사랑법 - 강은교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 있는 누워 있는 구름, 결코 잠 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 시집 《그대는 깊디 깊은 강》 ▲이해와 감상 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내적인 응시를 강조하는 시로 현명하게 사랑하는 방법을 차분하고 서정적인 어조로 이야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침묵 속의 응시와 성찰로 일.. 2020. 4. 10.
일어서라 풀아 / 강은교 일어서라 풀아 - 강은교 일어서라 풀아 땅 위 거름이란 거름 다 모아 구름송이 하늘 구름송이들 다 끌어들여 끈질긴 뿌리로 긁힌 얼굴로 빛나라 너희 터지는 목청 어영차 천지에 뿌려라. 이제 부는 바람들 전부 너희 숨소리 지나온 것 이제 꾸는 꿈들 전부 너희 몸에 맺혀 있던 것 저 바다 집채 파도도 너희 이파리 스쳐 왔다. 너희 그림자 만지며 왔다 일어서라 풀아 일어서라 풀아 이 세상 숨소리 빗물로 쏟아지면 빗물 마시고 흰 눈으로 펑펑 퍼부으면 가슴 한아름 쓰러지는 풀아 엉차 어영차 빛나라 너희 죽은 듯 엎드려 실눈 뜨고 있는 것들 - 출전 《소리집》(1982) ▲이해와 감상 이 시는 힘없는 민중을 자연물인 ‘풀’에 비유하여 민중이 지닌 끈질긴 생명력을 환기하면서 민중이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로.. 2020. 4. 9.
우리가 물이 되어 /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 아직 처녀(處女)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의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萬里)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人跡)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 출전 《우리가 물이 되어》(1987)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이라는 가정법 형식을 통해 삭막하고 황폐.. 2020. 4. 8.
한국생명보험회사 송일환 씨의 어느 날 / 황지우 한국생명보험회사 송일환 씨의 어느 날 - 황지우 1983년 4월 20일, 맑음, 18℃ 토큰 5개 550원, 종이컵 커피 150원, 담배 솔 500원, 한국일보 130원, 짜장면 600원, 미스 리와 저녁 식사하고 영화 한 편 8,600원, 올림픽 복권 5장 2,500원 표를 주워 주인에게 돌려 준 청과물상 金正權(46) 령=얼핏 생각하면 요즘 세상에 趙世衡같이 그릇된 셨기 때문에 부모님들의 생 활 태도를 일찍부터 익혀 평 가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 이다. (李元柱 군에게) 아 임감이 있고 용기가 있으니 공부를 하면 반드시 성공 대도둑은 대포로 쏘라 - 안의섭, 두꺼비 (11) 第 10610 號 ▲일화15만엔(45만원) ▲5․75캐럿물방울다이어1개(2천만원) ▲남자용파텍시계(1천만원) ▲황금목걸이5동쭝.. 2020. 4. 8.
출가하는 새 / 황지우 출가하는 새 - 황지우 새는 자기의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자기의 앉은 가지에 자기가 남긴 체중이 잠시 흔들릴 뿐 새는 자기가 앉은 자리에 자기의 투영이 없다 새가 날아간 공기 속에도 새의 동체가 통과한 기척이 없다 과거가 없는 탓일까 새는 냄새 나는 자기의 체취도 없다 울어도 눈물 한 방울 없고 영영 빈 몸으로 빈털터리로 빈 몸뚱어리 하나로 그러나 막강한 풍속을 거슬러 갈 줄 안다 생후의 거센 바람 속으로 갈망하며 꿈꾸는 눈으로 바람 속 내일의 숲을 꿰뚫어 본다 -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 ◎시어 풀이 출가 : ① 집을 떠나감. ② 세속의 집을 떠나 불문(佛門)에 듦. 투영 : 물체의 그림자를 비춤. 또는 그 그림자. 투사영(投射影). 동체 : 움직이는 몸 체취 : 몸 냄새 ▲이해와 .. 2020. 4. 8.
심인(尋人) / 황지우 심인(尋人) - 황지우 김종수 80년 5월 이후 가출 소식 두절 11월 3일 입대 영장 나왔음 귀가 요 아는 분 연락 바람 누나 829-1551 이광필 광필아 모든 것을 묻지 않겠다 돌아와서 이야기하자 어머니가 위독하시다 조순혜 21세 아버지가 기다리니 집으로 속히 돌아오라 내가 잘못했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 똥을 눈다 -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 심인(尋人) : 사람을 찾음. 또는 찾는 사람. 두절 : 교통이나 통신 따위가 막히거나 끊어짐. 영장 : 법원·관청이 강제 처분을 할 수 있도록 발부한 명령서.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신문의 심인란(사람을 찾는 작은 광고)을 인용하여 1980년대 억압적 분위기의 사회에서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민중들의 좌절감과 무력감을 풍자적으로 희화화(戲畫化.. 2020. 4. 8.
무등(無等) / 황지우 무등(無等) 황지우 山 절망의산, 대가리를밀어버 린, 민둥산, 벌거숭이산, 분노의산, 사랑의산, 침묵의 산, 함성의산, 증인의산, 죽음의산, 부활의산, 영생하는산, 생의산, 회생의 산, 숨가쁜산, 치밀어오르는산, 갈망하는 산, 꿈꾸는산, 꿈의산, 그러나 현실의산, 피의산, 피투성이산, 종교적인산, 아아너무나너무나 폭발적인 산, 힘든산, 힘센산, 일어나는산, 눈뜬산, 눈뜨는산, 새벽 의산, 희망의산, 모두모두절정을이루는평등의산, 평등한산, 대 지의산, 우리를감싸주는, 격하게, 넉넉하게, 우리를감싸주는어머니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1985) ▲이해와 감상 1985년에 발표된 황지우의 이 시 은 광주 무등산의 형태와 성향을 빌어 광주에서 일어난 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2020. 4. 7.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 ​- 황지우 ​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 2020. 4. 7.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황지우 영화가 시작되기 전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렬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 ◎시어 풀이 을숙도 : 부산광역시 사하구에 속하는 섬. 낙동강 하류의 철새 도래지. 횡대 : 가로로 줄을 지어 늘어선 대형. 깔쭉대면서 : 쓸데없는 말을 밉살스럽.. 2020. 4. 7.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 황지우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 황지우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零下) 십삼도(十三度) 영하(零下) 이십도(二十度) 지상(地上)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裸木)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 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 받은 몸으로, 벌 받는 목숨으로 기립(起立)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零下)에서 영상(零上)으로 영상(零上) 오도(五度) 영상(零上) 십삼도(十三度) 지상(地上)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 2020. 4. 6.
비 / 황인숙 비 - 황인숙 아, 저, 하얀, 무수한 맨종아리들, 찰박거리는 맨발들. 찰박 찰박 찰박 맨발들. 맨발들, 맨발들, 맨발들. 쉬지 않고 찰박 걷는 티눈 하나 없는 작은 발들. 맨발로 끼어들고 싶어지는. - 시집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1988)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감각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비가 오는 풍경을 생동감 있게 묘사한 시로, 비 오는 날의 정취를 인상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감각적인 언어로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는 이 시는 의도적인 쉼표의 사용, 빗물을 밟을 때 나는 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 ‘찰박’과 그 빗물을 밟는 순수한 대상을 상징하는 시어인 ‘맨발’의 반복은 이 시에 리듬감을 더해 준다. ‘찰박’과 ‘맨발’이란 두 개의 시어로 비가 내리는 풍경을 감각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이 .. 2020. 4. 6.
비문(飛蚊) / 황동규 비문(飛蚊) - 황동규 잠깐 스친 비에 젖다 만 낙엽을 밟으며 석양을 만나러 갔다. 어떤 이파리는 아직 살아 있다는 듯 빨갛게 익은 얼굴로 바지에 달라붙기도 했다. 구절초들이 시들고 있었고 날개 가장자리 몇 군데 패인 네발나비가 꽃 위에 앉아 같이 시들고 있었다. 세상 구석구석을 찬찬히 녹이는 황혼, 마치 거대한 동물의 내장(內腸) 같군, 누군가 말했다. 늦가울 저녁 나무, 꽃, 나비. 새들이 그대로 녹는 빛 속에 벌레 하나 눈 속에서 녹지 않고 날고 있다. 고개를 딴 데 돌려도 날고 있다. 눈을 한참 꾸욱 감았다 뜬다, 눈물이 고일 만큼, 눈물에도 녹지 않고 날고 있다. 날건 말건! - 시집 《꽃의 고요》(2006) ◎시어 풀이 비문(飛蚊) : 날파리증을 가리키는 의학 용어 ▲이해와 감상 이 시는 비문.. 2020. 4. 6.
풍장(風葬) / 황동규 풍장(風葬) - 황동규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 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 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 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트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 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白金)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 다오 바람 이불처럼 덮고 화장(.. 2020. 4. 6.
기항지 1 / 황동규 기항지 1 - 황동규 ​ 걸어서 항구(港口)에 도착했다. 길게 부는 한지(寒地)의 바람 바다 앞의 집들을 흔들고 긴 눈 내릴 듯 낮게 낮게 비치는 불빛 지전(紙錢)에 그려진 반듯한 그림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반쯤 탄 담배를 그림자처럼 꺼 버리고 조용한 마음으로 배 있는 데로 내려간다. 정박(碇泊) 중의 어두운 용골(龍骨)들이 모두 고개를 들고 항구의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에는 수삼 개(數三個)의 눈송이 하늘의 새들이 따르고 있었다. - 《사계》(1966) ◎시어 풀이 기항지(寄港地) : 배가 목적지로 가는 도중에 잠시 들르는 항구. 한지(寒地) : 추운 지방이나 장소 용골(龍骨) : 선박 바닥의 중앙을 받치는 길고 큰 재목. 이물에서 고물에 걸쳐 선체를 받치는 기능을 한다. ▲이해와 감상 .. 2020. 4. 6.
조그만 사랑 노래 / 황동규 조그만 사랑 노래 - 황동규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 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환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 시집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1978) ◎시어 풀이 동여맨 : 끈이나 새끼, 실 따위로 두르거나 감거나 하여 묶은. 성긴 : 물건의 사이가 뜬. ▲ 이해와 감상 이 시는 ‘당신’으로부터 과거의 추억을 단절하는 이별의 편지를 받은 화자의 안타까운 심정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사랑하는 이에게 이별을 통보받는다면, 누구나 눈앞이 캄캄해지고 의욕이 다.. 2020. 4. 5.
즐거운 편지 / 황동규 즐거운 편지 ​ - 황동규 ​ ​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빠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 출전 《현대문학》(1958)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1958년 《현대문학》 11월호에 추천된 황동규의 작품으로, ‘그대’에.. 2020. 4. 4.
그대의 별이 되어 / 허영자 그대의 별이 되어 - 허영자 사랑은 눈멀고 귀먹고 그래서 멍멍히 괴어 있는 물이 되는 일이다. 물이 되어 그대의 그릇에 정갈히 담기는 일이다. 사랑은 눈 뜨이고 귀 열리고 그래서 총총히 빛나는 별이 되는 일이다. 별이 되어 그대 밤하늘을 잠 안 자고 지키는 일이다. 사랑은 꿈이다가 생시이다가 그 전부이다가 마침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일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그대의 한 부름을 고즈넉이 기다리는 일이다 ◎시어 풀이 멍멍히 ; 정신이 빠진 것 같이 어리벙벙하게 정갈히 : 깨끗하고 깔끔하게 고즈넉이 : 말없이 다소곳하거나 잠잠하게.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시적 화자가 생각하는 사랑의 의미를 나열하여 제시하고 있는 작품으로, 시인은 ‘사랑’이 자신을 비우고,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주며, 변하지 핞고 .. 2020. 4. 4.
자수(刺繡) / 허영자 자수(刺繡) - 허영자 마음이 어지러운 날은 수(繡)를 놓는다. 금실 은실 청홍실 따라서 가면 가슴 속 아우성은 절로 갈앉고 처음 보는 수풀 정갈한 자갈돌의 강변에 이른다. 남향 햇볕 속에 수를 놓고 앉으면 세사번뇌(世事煩惱) 무궁(無窮)한 사랑의 슬픔을 참아 내올 듯 머언 극락정토(極樂淨土) 가는 길도 보일 성싶다. - 시집 《가슴엔 듯 눈엔 듯》(1966) 수록 ◎시어 풀이 자수(刺繡) : 옷감이나 헝겊 따위에 여러 가지의 색실로 그림, 글자, 무늬 따위를 수놓는 일. 세사번뇌(世事煩惱):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로 인한 마음의 괴로움 무궁(無窮):공간이나 시간 따위가 끝이 없음.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시적 화자의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 심리 상태가 자수라는 매개를 통해 세상 번뇌와 사랑의 슬픔을 .. 2020. 4. 4.
귀천(歸天) / 천상병 귀천(歸天) -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출전 《주막에서》(1979) ◎시어 풀이 귀천(歸天) : 넋이 하늘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사람의 죽음을 이르는 말 스러지는 : 형체나 현상 따위가 차차 희미해지면서 없어지는.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삶과 죽음에 대한 달관한 자세를 소박한 언어로 그려낸 시로, 와 더불어 천상병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1979년 ≪창작과 비평≫에 발표되었으며, 같은 해에 간행된 시집 ≪주막에서≫에 실려 있다. 어쩌면 인간의 삶은 한 번쯤 아름다운 기억을 .. 2020. 4. 4.
갈매기 / 천상병 갈매기​ -천상병 그대로의 그리움이 갈매기로 하여금 구름이 되게 하였다 ​ 기꺼운 듯 푸른 바다의 이름으로 흰 날개를 하늘에 묻어 보내어 ​ 이제 파도도 빛나는 가슴도 구름을 따라 먼 나라로 흘렀다 ​ 그리하여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날아오르는 자랑이었다 ​ 아름다운 마음이었다 -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1987)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천상병 시인의 초기작품으로 자신의 주관적 인식을 그대로 드러낸 매우 감상적인 작품으로서, 하늘과 지상을 자유롭게 오가는 ‘갈매기’에 의탁하여 그리움의 정서를 표현한 작품이다. 한 마디로 매우 소박하고 감상적이다. 어려운 비유나 심원한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피상적인 이미지에 쉽게 자신의 감상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움이 갈매기를 구름이 되게 하고, 푸른 .. 2020. 4. 4.
들판이 적막하다 / 정현종 들판이 적막하다 - 정현종 가을 햇볕에 공기에 익는 벼에 눈부신 것 천지인데, 그런데, 아, 들판이 적막하다 ― 메뚜기가 없다! 오 이 불길한 고요 ― 생명의 황금 고리가 끊어졌느니……. - 출전 《한 꽃송이》(1992)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심각한 생태계 파괴의 현실을 고발하고 있는 시로, 들판에 메뚜기가 없다는 사실을 통해 생태계의 질서가 무너진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화자는 풍요로운 가을 들판의 모습과 메뚜기가 없는 들판의 모습을 대비하여 시적 상황을 강조하고, 쉽고 간결한 언어, 느낌표, 말줄임표 등을 통해 인간의 욕망으로 자연의 생태계가 파괴된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1연에서 화자는 풍요로운 가을 들판을 걸어가고 있다. 따스한 가을 햇볕과 상쾌한 가을 공기 속에서 들녘에 익어 가는 벼를 보며.. 2020. 4. 3.
흙냄새 / 정현종 흙냄새 - 정현종 흙냄새 맡으면 세상에 외롭지 않다 ​ 뒷산에 올라가 삭정이로 흙을 파헤치고 거기 코를 박는다. 아아, 이 흙냄새! 이 깊은 향기는 어디 가서 닿는가. 머나멀다. 생명이다. 그 원천. 크나큰 품. 깊은 숨. 생명이 다아 여기 모인다. 이 향기 속에 붐빈다. 감자처럼 주렁주렁 딸려 올라온다. ​ 흙냄새여 생명의 한통속이여. - 제4 시집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1989) ▲이해와 감상 기계화된 현대의 물질문명 속에서 우리는 매일 흙 대신 아스팔트로 포장된 도로를 걷는다. 그래서인지 세상은 외롭고 메마르게 느껴진다. 1989년에 발표된 정현종의 이 시는 흙냄새라는 후각적 이미지를 통해서 생명의 원천과 그 에 대한 경외감을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시는 총 3연으로 된 자유시인데, .. 2020. 4. 3.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 정현종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 정현종 그래 살아봐야지 너도 나도 공이 되어 떨어져도 튀는 공이 되어 살아봐야지 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 공처럼, 탄력의 나라의 왕자처럼 가볍게 떠올라야지 곧 움직일 준비 되어 있는 꼴 둥근 공이 되어 옳지 최선의 꼴 지금의 네 모습처럼 떨어져도 튀어 오르는 공 쓰러지는 법이 없는 공이 되어 - 시집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1984)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공을 제재로 하여, 튀어오르는 공처럼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삶의 자세를 노래하고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을 도형으로 그린다면 아마도 둥근 공의 모양이 아닐까? 우주를 이루고 있는 태양과 별이 둥글며 대부분 꽃의 열매나 짐승의 알들도 둥글다. 멈추지 않는 탄력의 형태, 화자는 힘.. 2020. 4. 3.
섬 / 정현종 섬 - 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 시집 《나는 별아저씨》(1978) ▲이해와 감상 ‘섬’은 바다 위의 고립된 공간이다. ‘바다’를 건너야만 ‘섬’에 다다를 수 있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건너야 할 바다가 있고, 그 ‘바다’를 건너야 다다를 수 있는 ‘섬’이 있다. 화자는 ‘섬’으로 상징되는 소통의 공간을 소망하고 있다. 무언가를 소망한다는 것은 무언가에 대한 결핍이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화자는 사람들 사이에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소통의 장으로서의 ‘섬’에 가고 싶다는 소망을 드러내고 있다. 1행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섬'의 존재를 알린다. 여기서 ‘섬’은 단절된 인간관계 속에서 그들을 이어 줄 수 있는,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가능하도록 하는 통로로.. 2020. 4.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