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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기항지 1 / 황동규

by 혜강(惠江) 2020. 4. 6.

 

 

 

 

 

기항지 1

 

 

- 황동규

 

 

 

걸어서 항구(港口)에 도착했다.

길게 부는 한지(寒地)의 바람

바다 앞의 집들을 흔들고

긴 눈 내릴 듯

낮게 낮게 비치는 불빛

지전(紙錢)에 그려진 반듯한 그림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반쯤 탄 담배를 그림자처럼 꺼 버리고

조용한 마음으로

배 있는 데로 내려간다.

정박(碇泊) 중의 어두운 용골(龍骨)들이

모두 고개를 들고

항구의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에는 수삼 개(數三個)의 눈송이

하늘의 새들이 따르고 있었다.

 

 

            - 사계(1966)

 

 

시어 풀이

 

 

기항지(寄港地) : 배가 목적지로 가는 도중에 잠시 들르는 항구.

한지(寒地) : 추운 지방이나 장소

용골(龍骨) : 선박 바닥의 중앙을 받치는 길고 큰 재목. 이물에서 고물에 걸쳐 선체를 받치는 기능을 한다.

 

 

이해와 감상

 

 

  이 시는 기항지의 삭막한 풍경 묘사를 통해서 방랑과 정착 사이에서 갈등하는 시인이 방황과 고독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소망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표현상의 특징은 감정이나 사상을 배제한 채 대상에 대한 객관적 묘사를 통해 시인의 내면을 암시하고 있으며, 사물을 의인화하여 시적 화자의 내면적 정서를 드러내는 매개물로 사용하고 있다.

 

 이 시는 모두 15행으로 구성된 단연시(單聯詩)이지만, 내용 구성에 따라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1~5행에서는 항구에 도착한 시적 화자가 바라본 항구의 황량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 먼저, 시적 화자는 걸어서 항구(港口)에 도착했다라고 표현함으로써 시작 자아가 육지의 삶을 청산하고 어딘가를 향해 떠나고자 하는 충동을 지니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살풍경한 항구의 이미지는 바로 이러한 시적 자아가 지금, 항구를 떠나 먼 곳으로 가고 싶어 하는 필연적 이유를 암시해준다. ‘한지(寒地)의 바람이라든가 낮게 낮게 비치는 불빛등의 이미지를 통해서 시적 자아가 도착한 기항지의 싸늘하고 음침한 모습이 묘사된다. 물론 이러한 항구의 이미지는 단지 항구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시적 자아의 황폐한 내면을 암시하는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6행에서 10행에서는 일상적 가치가 지배하는 육지의 삶을 떠나 바다를 통해 모험과 방랑의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결단이 제시되고 있다. ‘지전(紙錢)에 그려진 반듯한 그림을/ 주머니에 구겨넣는다거나 반쯤 탄 담배를 그림자처럼꺼버리는 행동은 망설임과 갈등을 청산하고 과감하게 행동으로 나아갈 것을 다짐하는 결단의 행위를 암시한다. 시적 자아가 향하는 곳이 라는 점에서 육지의 삶을 청산하고 바다로 나아가 새로운 삶을 추구할 것을 결의하고 있다.

 

 시의 마지막 부분인 11행에서 15행에서는 지금까지 진행된 시적 전개에 급격한 전환이 일어나면서 결론에 도달한다. ‘용골(龍骨)’이란 배의 밑바닥을 이루는 뼈대를 지칭하는데, 바다를 향해 떠나려는 시적 자아와 반대로 그것들은 모두 머리를 들고/항구(港口)의 안을 들여다보고있다. 방랑과 모험을 꾀하는 시적 자아와 반대로 배들은 모두 지친 항해를 쉬고 육지에 안착하여 안정을 취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처럼 안정을 희구하는 용골의 모습은 방랑과 모험을 향한 시적 자아의 과감한 결단을 흔들리게 한다. 시의 마지막 구절에 등장하는 수삼개(數三個)의 눈송이하늘의 새들은 어떤 지향점을 상실하고 부유(浮游)하는 이미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처럼 목표를 상실하고 부유하는 들의 모습은 모험을 향해 나아가려던 시적 자아의 내면적 회의와 갈등을 대변해주고 있다.

 

 결국, 이 시는 새로운 삶을 향해 떠날 수밖에 없는 황폐한 내면 풍경, 모험과 방랑을 위한 결단의 마음, 그리고 그러한 결단의 혼란 상황 등을 차례로 묘사하면서 시적 자아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곤혹스러운 심리적 방황과 갈등의 상황을 묘사하고자 했다.

 

 

작자 황동규(黃東奎, 1938 ~ )

 

 

 시인. 평남 숙천 출생. 현대문학<시월>, <즐거운 편지> 등을 추천받아 등단하였다. 꿈과 이상을 억압하는 현실에 대한 부정이 시적 원동력으로 작용하여 고통스러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비극적인 아름다움을 시적 주제로 삼아 현대 지식인들이 느끼는 섬세한 서정을 이미지즘적인 기법을 빌려 표현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왔으나 풍장(風葬)을 간행한 후기에 와서는 삶과 죽음을 하나로 감싸 안으며 죽음의 허무를 초극한다. 죽음에 대한 명상으로 삶의 무게를 덜고, 나아가 죽음조차 길들이겠다는 의미의 자유분방한 표현을 담고 있다

 

 시집으로 어떤 개인 날(1961), 삼남에 내리는 눈(1968),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1978), 풍장(1983) 등이 있다.

 

 

 

/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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