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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비문(飛蚊) / 황동규

by 혜강(惠江) 2020. 4. 6.

 

<사진 : 비문증 환자의 시야>

 

 

 

비문(飛蚊)

 

 

- 황동규 

 

 

 

 

잠깐 스친 비에 젖다 만 낙엽을 밟으며

석양을 만나러 갔다.

어떤 이파리는 아직 살아 있다는 듯

빨갛게 익은 얼굴로 바지에 달라붙기도 했다.

구절초들이 시들고 있었고

날개 가장자리 몇 군데 패인 네발나비가

꽃 위에 앉아 같이 시들고 있었다.

세상 구석구석을 찬찬히 녹이는 황혼,

마치 거대한 동물의 내장(內腸) 같군,

누군가 말했다.

 

늦가울 저녁

나무, , 나비. 새들이 그대로 녹는 빛 속에

벌레 하나 눈 속에서

녹지 않고 날고 있다.

고개를 딴 데 돌려도 날고 있다.

눈을 한참 꾸욱 감았다 뜬다, 눈물이 고일 만큼,

눈물에도 녹지 않고 날고 있다.

 

날건 말건!

 

 

                  - 시집 꽃의 고요(2006)

 

 

시어 풀이

 

비문(飛蚊) : 날파리증을 가리키는 의학 용어

 

 

이해와 감상

 

 

 이 시는 비문증에 시달리는 시인이 스스로를 타이르기 위해 쓴 작품으로, 비문증에 대처하는 의연한 자세를 담담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비문증(飛蚊症)이란 주로 노안(老眼)의 시야에 모기 같은 벌레가 나타나 사라지지 않고 떠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다. 날파리증이라 불리기도 한다. 부유물들이 보이는 까닭은 그림자가 망막에 가려지거나이들을 통과하는 빛의 굴절 때문이며 시야에 하나 또한 여러 개가 한꺼번에 나타날 수 있다. 관찰자의 눈앞에 느리게 떠다니는 부유물은 점, , 조각, 거미줄처럼 나타난다. 이러한 부유물들이 눈 안에 실제 존재하므로 이들은 착시가 아닌 내시 현상으로 간주된다.

 

 황동규 시인은 <아픔이 시를 쓰게 한다.>는 글에서 비문증에 시달려 왔음을 밝힌 적이 있다. “눈앞에 물체가 날아다니는 비문증이 생겼습니다. 별일을 다 해도 눈앞의 물체가 사라지지 않고 날아다녀서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고통의 시를 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날건 말건내버려두자고 시를 썼더니, 그다음부터는 의식할 때만 보이더군요. 결국, 시와 대화하면서 시가 병을 완화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최보식 : 조선일보 기사에서)

 

 이 시에서 화자는 모든 것이 가을빛 속에서 없어지는데, 화자의 눈 속에 나는 듯한 모기만 없어지지 않는 증세를 떨쳐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시인은 떨쳐내는 대신 날건 말건이라며 고통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1연은 늦가을 해 질 무렵에 숲속을 거닐며 숲속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빨갛게 익은 얼굴로 표현된 단풍잎과 시들어 가는 구절초, 나비가 나는 풍경이 가을 석양을 아름답게 꾸미고 있다. ‘마치 거대한 동물의 내장 같군이라는 표현은 모든 것이 가을빛 속에 녹아 없어지는 듯한 느낌을 드러낸다.

 

 2연은 비문증에 시달리고 있는 모습을 1연과 대비시키고 있다. 모든 자연물이 가을 석양빛에 녹아 들어가고 있는 때에 시인은 벌레 하나 눈 속에서/ 녹지 않고 날고 있다라고 표현하며, 비문증으로 인해 시달리고 있는 모습이 그려진다. 눈을 감았다 떠도, 고인 눈물에도 녹지 않는다며 고통을 호소한다.

 

 그러나, 3연에서 시인은 비문증에 시달리며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날건 말건!’이라는 짤막한 말로 마무리한다. 비문증의 고통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인의 태도는 비문증에 대처하는 의연한 자세로서 기상천외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작자 황동규(黃東奎, 1938 ~ )

 

 

  시인. 평남 숙천 출생. 현대문학<시월>, <즐거운 편지> 등을 추천받아 등단하였다. 꿈과 이상을 억압하는 현실에 대한 부정이 시적 원동력으로 작용하여 고통스러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비극적인 아름다움을 시적 주제로 삼아 현대 지식인들이 느끼는 섬세한 서정을 이미지즘적인 기법을 빌려 표현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왔으나 풍장(風葬)을 간행한 후기에 와서는 삶과 죽음을 하나로 감싸 안으며 죽음의 허무를 초극한다. 죽음에 대한 명상으로 삶의 무게를 덜고, 나아가 죽음조차 길들이겠다는 의미의 자유분방한 표현을 담고 있다.

 

  시집으로 어떤 개인 날(1961), 삼남에 내리는 눈(1968),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1978), 풍장(1983), 꽃의 고요(2006) 등이 있다.

 

 

 

/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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