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767

사람이 풍경으로 태어나 / 정현종 사람이 풍경으로 태어나 - 정현종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앉아 있거나 차를 마시거나 잡담으로 시간에 이스트를 넣거나 그 어떤 때거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그게 저 혼자 피는 풍경인지 내가 그리는 풍경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 행복한 때는 없다 - 시집 《나는 별 아저씨》(1978) ◎시어 풀이 이스트(yeast) : 빵을 부풀리는데 사용하는 재료 ▲이해와 감상 정현종의 두 번째 시집인 《나는 별 아저씨》(1978)에 발표된 이 시는 사람이 하나의 풍경으로 보이는 경험을 하는 순간에 전개한 사유의 과정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주변환경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풍경은 어떠한 작위(作爲)나 인위(人爲)가 없는, 무위(無爲)처럼 보이는 대상이다. .. 2020. 4. 3.
유방(乳房)의 장 / 장순하 유방(乳房)의 장 - 장순하 난 몰라, 모시 앞섶 풀이 세어 그렇지 백련 꽃봉오리 산딸기도 하나둘씩 상그레 웃음 벙그는 소리 없는 개가(凱歌)! 불길을 딛고 서서 옥으로 견딘 순결 모진 가뭄에도 촉촉이 이슬 맺어 요요(嫋嫋)히 시내 흐르는 내일에의 동산아! - 《이삭줍기》(2001) ◎시어 풀이 상그레 : 눈과 입을 귀엽게 움직이며 소리 없이 부드럽게 웃는 모양. 개가(凱歌) : 1. 개선가,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 부르는 노래. 2. 이기거나 큰 성과가 있을 때의 환성 요요(嫋嫋)히 : 맵시가 있고 날씬하게. ▲이해와 감상 이 시는 고전적 한국 여성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런 기분이랄까요, 한 폭의 미인도를 어디 문갑 속에라도 감춰 뒀다 몰래 꺼내 보는 듯한. 시행을 따라갈수록 저절로 눈.. 2020. 4. 1.
고무신 / 장순하 고무신 - 장순하 눈보라 비껴 나는 全―群―街―道― 퍼뜩 차창(車窓)으로 스쳐 가는 인정(人情)아! 외딴집 섬돌에 놓인 하나 둘 세 켤레 - 시집 《백색부》(1968) ◎시어 풀이 비껴 나는 : 비스듬히 나는 全-群-街-道 : ‘전주~군산’ 가도 섬돌 : 집채의 앞뒤에 오르내릴 수 있게 놓은 돌층계.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시각적인 요소가 두드러진 실험적인 시조로, 회화적이고 입체적인 형식을 통해 차창 밖으로 보이는 소박한 시골 풍경에서 느끼는 따스한 정을 그려 내고 있다. 이 시조는 독특한 형태적 매력을 가지고 있다. 매우 실험적인 시조로서, 3장 6구의 형식을 지니는 구별 배행 시조의 형태로 되어 있으며, 줄표, 다양한 글자 크기, 도형 등을 활용한 파격적인 형식을 통해 시각적인 효과를 강조하고 있.. 2020. 4. 1.
서해상의 낙조 / 이태극 서해상의 낙조 - 이태극 어허 저기 물이 끓는다. 구름이 마구 탄다. 동근 원구가 검붉은 불덩이다. 수평선 한 지점 위로 머문듯이 접어든다. 큰 바퀴 피로 붙들며 반 나마 잠기었다. 먼 뒷섬들이 다시 환히 얼리드니 아차차 채운만 남기고 정녕 없어졌구나. 구름 빛도 가라 앉고 섬들도 그림 진다. 끓던 물도 검푸르게 잔잔히 숨더니만 어디서 살진 반달이 함을 따라 웃는고. - 《꽃과 연인》(1957) ◎시어 풀이 원구(圓球) : 둥근 공이나 알. 나마 : 받침 없는 체언에 붙어, 만족하지 못함을 참고 아쉬운 대로 양보함을 나타내는 보조사. 얼리더니 : 어울리더니 아차차 : 아쉬움을 나타내는 감탄사 채운(彩雲) : 여러 빛깔로 아롱진 고운 구름 그림 진다 : 그림자 진다. 살진 : 살이 많고 튼실한, 살이 오른.. 2020. 4. 1.
봄비 / 이수복 봄비 - 이수복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香煙)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 시집 《봄비》(1969) ◎시어 풀이 ~것다 : (예스러운 표현으로) 해라할 자리에 쓰여, 경험이나 이치로 미루어 틀림없이 그러할 것임을 추측하거나 다짐하는 뜻을 나타내는 종결 어미. 시새워 : 남보다 낫기 위하여 서로 다퉈 벙글어질 : 맺힘을 풀고 툭 터지며 활짝 열려질. 향연(香煙) : 향이 타며 나는 연기. ▲이해와 감상 이 시는 머지않아 다가올 아름다운 봄날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봄비 내리는 날의 애상적 정서를.. 2020. 4. 1.
사랑하는 별 하나 / 이성선 사랑하는 별 하나 - 이성선 나도 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외로워 쳐다보면 눈 마주쳐 마음 비춰 주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도 꽃이 될 수 있을까. 세상일이 괴로워 쓸쓸히 밖으로 나서는 날에 가슴에 화안히 안기어 눈물짓듯 웃어 주는 하얀 들꽃이 될 수 있을까. 가슴에 사랑하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외로울 때 부르면 다가오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마음 어두운 밤 깊을수록 우러러 쳐다보면 반짝이는 그 맑은 눈빛으로 나를 씻어 길을 비추어 주는 그런 사람 하나 갖고 싶다. ▲이해와 감상 사람들은 누구나 외롭고 힘들 때, 진심으로 자신을 이해하고 위로해 주는 대상을 찾게 된다. 그리고 자신 또한 타인에게 힘과 위로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한다. 이 시는 서로에게 힘과 위로가 되는 따뜻.. 2020. 3. 31.
백담사 / 이성선 백담사 - 이성선 저녁 공양을 마친 스님이 절 마당을 쓴다. 마당 구석에 나앉은 큰 산 작은 산이 빗자루에 쓸려나간다. 산에 걸린 달도 빗자루 끝에 쓸려나간다. 조그만 마당 하늘에 걸린 마당 정갈히 쓸어놓은 푸르른 하늘에 푸른 별이 돋기 시작한다. 쓸면 쓸수록 별이 더 많이 돋고 쓸면 쓸수록 물소리가 더 많아진다. ▲이해와 감상 / 해설 : 남상학 시인 스님이라고 해서 반드시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아 눈을 감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보다. 화자는 매일같이 절 마당을 쓰는 스님의 비질하는 행위를 관찰함으로써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수행에 대한 깨달음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는 ‘주어+서술어’로 된 유사한 문장 구조의 변형과 반복을 통해 리듬감을 획득하고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저녁 공양을 마친 스님이 .. 2020. 3. 31.
누룩 / 이성부 누룩 - 이성부 누룩 한 덩이가 뜨는 까닭을 알겠느냐. 저 혼자 무력함에 부대끼고 부대끼다가 알맞은 바람 만나 살며시 더운 가슴, 그 사랑을 알겠느냐. 오가는 발길들 여기 멈추어 밤새도록 우는 울음을 들었느냐 저 혼자서 찾는 길임을 엄동설한 칼별은 알고 있나니. 무르팍 으깨져도 꽃피는 가슴. 그 가슴 울림 들었느냐. 속 깊이 쌓이는 기다림 삭고 삭아 부서지는 일 보았느냐. 지가 죽어 썩어 문드러져 우리 고향 좋은 물 만나면 덩달아서 함께 끓는 마음을 알겠느냐. 춤도 되고 기쁨도 되고 해 솟는 얼굴도 되는 죽음을 알겠느냐. 아 지금 감춰둔 누룩 뜨나니. 냄새 퍼지나니. - 시집 《백제행》 (1977)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술이 되기 위한 ‘누룩’의 인내와 자기희생, 민중의 자기희생과 연대 의식에 대한 기.. 2020. 3. 31.
산길에서 / 이성부 산길에서 - 이성부 이 길을 만든 이들이 누구인지를 나는 안다 이렇게 길을 따라 나를 걷게 하는 그이들이 지금 조릿대 밭 눕히며 소리치는 바람이거나 이름 모를 풀꽃들 문득 나를 쳐다보는 수줍음으로 와서 내 가슴 벅차게 하는 까닭을 나는 안다 그러기에 짐승처럼 그이들 옛 내음이라도 맡고 싶어 나는 자꾸 집을 떠나고 그때마다 서울을 버리는 일에 신명나지 않았더냐 무엇에 쫓기듯 살아가는 이들도 힘을 다하여 비칠거리는 발걸음들도 무엇 하나씩 저마다 다져 놓고 사라진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나는 배웠다 그것이 부질없는 되풀이라 하더라도 그 부질없음 쌓이고 쌓여져서 마침내 길을 만들고 길 따라 그이들 따라 오르는 일 이리 힘들고 어려워도 왜 내가 지금 주저앉아서는 안 되는지를 나는 안다 - 시집 《지리산》(2001) .. 2020. 3. 31.
벼 / 이성부 벼 - 이성부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워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 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 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 …. - 시집 《우리들의 양식》(1974)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벼’라는 상징적 소재를 통해 민족, 민중의 공동체 의식을 나타낸 작품으로, 비유와 상징의 기법으로 주제를 형상화하고 있다. ‘벼’를 .. 2020. 3. 31.
봄 / 이성부 봄 - 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 시집 《우리들의 양식》(1974)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 부조리한 시대가 가고 새 시대가 올 것이라는 신념을 봄을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 화자인 ‘나’는 ‘봄’을 ‘너’로 의인화하여, ‘너’가 오지 .. 2020. 3. 30.
서시(序詩) / 이성복 서시(序詩) - 이성복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 사방에서 새 소리 번쩍이며 어두워 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 시집 《남해 금산》(1987)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화자의 일상과 관련지어 담담한 어조로 표현하고 있는, 일종의 연애시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일은 쓸쓸하고 허전하기만 하다. 더구나 낯선 곳에서 혼자 저녁을 사 먹어야 할 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더더욱 깊어진다. 이 시는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에 있는 시적 화자가 '맞은편 .. 2020. 3. 30.
서해(西海) / 이성복 서해(西海) - 이성복 아직 서해엔 가 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거기 계실지 모르겠기에 그곳 바다인들 여느 바다와 다를까요 검은 개펄에 작은 게들이 구멍 속을 들락거리고 언제나 바다는 멀리서 진펄에 몸을 뒤척이겠지요 당신이 계실 자리를 위해 가 보지 않은 곳을 남겨 두어야 할까 봅니다 내 다 가보면 당신 계실 곳이 남지 않을 것이기에 내 가 보지 않은 한쪽 바다는 늘 마음속에서나 파도치고 있습니다 - 시집 《그 여름의 끝》(1990) ◎시어 풀이 *개펄 : 갯가의 개흙이 깔린 벌판. *진펄 : 땅이 질어 질퍽한 벌. ▲이해와 감상 이 시에서 ‘서해’는 ‘당신’이 있는 곳으로, ‘당신’이 보고 싶지만 ‘당신’을 위해 서해에 가지 않겠다는 역설적인 발상을 통해 ‘당신’에 대한 화자의 간절하고 애틋한 사.. 2020. 3. 30.
꽃 피는 시절 / 이성복 꽃 피는 시절 - 이성복 ​ 멀리 있어도 나는 당신을 압니다. 귀먹고 눈먼 당신은 추운 땅속을 헤매다 누군가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되려 하셨지요. ​ 부르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생각지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당신이 올 때면 먼 발치 마른 흙더미도 고개를 듭니다. ​ 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나를 알지 못하고 나를 벗어나고 싶어 몸부림하지만 ​ 내게서 당신이 떠나갈 때면 내 목은 갈라지고 실핏줄 터지고 내 눈, 내 귀, 거덜 난 몸뚱이 갈가리 찢어지고 ​ 나는 울고 싶고, 웃고 싶고, 토하고 싶고, 벌컥벌컥 물사발 들이켜고 싶고 길길이 날뛰며 절편보다 희고 고운 당신을 잎잎이, 뱉아 낼 테지만 ​ 부서지고 무너지며 당신을 보낼 일이 아득합니다. 굳은 살가죽에 불 댕길 일 .. 2020. 3. 30.
가을 운동회 / 이성교 가을 운동회 - 이성교 둥둥 북소리에 만국기가 오르면 온 마을엔 인화(人花)가 핀다.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연신 터지는 출발 신호에 땅이 흔들린다. 차일 친 골목엔 자잘한 웃음이 퍼지고 아이들은 쏟아지는 과일에 떡타령도 잊었다. 하루 종일 빈 집엔 석류가 입을 딱 벌리고 그 옆엔 황소가 누런 하품을 토하고 있다.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온갖 산들이 모두 다 고개를 늘이면 바람은 어느 새 골목으로 왔다가 오색(五色) 테이프를 몰고 갔다. - 《보리 팰 무렵》(1974) ◎시어 풀이 차일 : 햇볕을 가리기 위해 치는 포장. 떡 타령 : 떡을 달라고 조르는 일 ▲이해와 감상 옛날 시골 마을의 운동회는 온 마을의 잔치였다. 이 시는 마을 전체가 들썩일 정도로 활기차고 흥겨운 가을 운동회의 분위기를 .. 2020. 3. 30.
세한도(歲寒圖) - 벼루읽기 / 이근배 세한도(歲寒圖) - 벼루읽기 - 이근배 1 바람이 세다 산방산(山房山) 너머로 바다가 몸을 틀며 기어오르고 있다 볕살이 잦아지는 들녘에 유채 물감으로 번지는 해묵은 슬픔 어둠보다 깊은 고요를 깔고 노인은 북천을 향해 눈을 감는다 가시울타리의 세월이 저만치서 쓰러진다 바다가 불을 켠다. 2 노인이 눈을 뜬다 낙뢰(落雷)처럼 타 버린 빈 몸 한 자루의 붓이 되어 송백의 푸른 뜻을 세운다 이 갈필(渴筆)의 울음을 큰선비의 높은 꾸짖음을 산인들 어찌 가릴 수 있으랴 신의 손길이 와 닿은 듯 나무들이 일어서고 대정(大靜) 앞바다의 물살로도 다 받아낼 수 없는 귀를 밝히는 소리가 빛으로 끓어넘친다. 노인의 눈빛이 새잎으로 돋는다.​ ​ - 시집 《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2004) ◎시어 풀이 볕살 .. 2020. 3. 29.
오렌지 / 신동집 오렌지 - 신동집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오렌지는 여기 있는 이대로의 오렌지다. 더도 덜도 아닌 오렌지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을 벗길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찹잘한 속살을 깔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대는 순간 오렌지는 이미 오렌지가 아니고 만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다. 오렌지도 마찬가지 위험한 상태다. 시간이 똘똘 배암의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에 한없이 어진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누구인지 잘은 아직 몰라도. - 시집 《누가 묻거든.. 2020. 3. 29.
향(香)아 / 신동엽 향(香)아 - 신동엽 향아 너의 고운 얼굴 조석으로 우물가에 비최이던 오래지 않은 옛날로 가자 수수럭거리는 수수밭 사이 걸찍스런 웃음들 들려 나오며 호미와 바구니를 든 환한 얼굴 그림처럼 나타나던 석양…… 구슬처럼 흘러가는 냇물가 맨발을 담그고 늘어앉아 빨래들을 두드리던 전설 같은 풍속으로 돌아가자 눈동자를 보아라 향아 회올리는 무지개빛 허울의 눈부심에 넋 빼앗기지 말고철따라 푸짐히 두레를 먹던 정자나무 마을로 돌아가자 미끈덩한 기생충의 생리와 허식에 인이 배기기 전으로 눈빛 아침처럼 빛나던 우리들의 고향 병들지 않은 젊음으로 찾아가자꾸나 향아 허물어질까 두렵노라 얼굴 생김새 맞지 않는 발돋움의 흉낼랑 그만 내자 들국화처럼 소박한 목숨을 가꾸기 위하여 맨발을 벗고 콩바심하던 차라리 그 미개지(未開地)에로.. 2020. 3. 29.
산에 언덕에 / 신동엽 산에 언덕에 - 신동엽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 담을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 시집 《아사녀》(1963) ◎시어 풀이 화사한 : 화려하게 고운. 피어날지어이 : ‘피어날 것이네’의 옛 말투. 소망과 확신을 표현하는 종결어미 행인(行人) : 길을 가는 사람. 담을지네 : ‘담을 것이네’의 옛 말투. 소망과 확신을 표현하는 종결 어미 ▲이해와 감상 이 시는 불행한 삶을 살다 간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과, ‘그’가 추구.. 2020. 3. 28.
종로 5가 / 신동엽 종로 5가 - 신동엽 이슬비 오는 날, 종로 5가 서시오판 옆에서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밤 열한 시 반, 통금에 쫓기는 군상(群像) 속에서 죄 없이 크고 맑기만 한 그 소년의 눈동자와 내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갓 나왔을까. 새로 사 신은 운동환 벗어 품고 그 소년의 등허리선 먼 길 떠나온 고구마가 흙 묻은 얼굴들을 맞부비며 저희끼리 비에 젖고 있었다. 충청북도 보은 속리산, 아니면 전라남도 해남 땅 어촌(漁村) 말씨였을까. 나는 가로수 하나를 걷다 되돌아섰다. 그러나 노동자의 홍수 속에 묻혀 그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눈녹이 바람이 부는 질척질척한 겨울날, 종묘(宗廟) 담을 끼고 돌다가 나는 보았어. 그의 누나였을까. 부은 한쪽 눈의 창녀가 양지쪽 .. 2020. 3. 28.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 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 항아리 아침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 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畏敬)을 알리라 아침저녁 네 머리 위 쇠 항아릴 찢고 티 없이 맑은 구원(久遠)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憐憫)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모아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2020. 3. 28.
껍데기는 가라 / 신동엽 designsejong님의 블로그>  껍데기는 가라  -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 《52인 시집》(1967)  ◎시어 풀이  동학년 : 동학 혁명이 일어났던 1894년. 곰나루 : 충청남도 공주의 옛 이름. 동학 혁명 당시 우금치 전투가 있었던 곳.초례청 : 전통적인 혼례를 치르는 장소. 맞절 : 동등한 예를 갖추어 마주하는 절.. 2020. 3. 28.
나목(裸木) / 신경림 나목(裸木) - 신경림 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 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고 있다 밤이면 메마른 손끝에 아름다운 별빛을 받아 드러낸 몸통에서 흙 속에 박은 뿌리까지 그것으로 말끔히 씻어내려는 것이겠지 터진 살갗에 새겨진 고달픈 삶이나 뒤틀린 허리에 배인 구질구질한 나날이야 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어 한밤에 내려 몸을 덮는 눈 따위 흔들어 시원스레 털어 다시 알몸이 되겠지만 알고 있을까 그들 때로 서로 부둥켜안고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 시집 《쓰러진 자의 꿈》(1993) ◈ 시어 풀이 *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 나뭇잎을 다 떨구고 * 팔을 내뻗고 있다 : 의인법 * 터진 살갗, 뒤틀린 허리 : 삶의 온갖 상처 * 깊은 울음 .. 2020. 3. 27.
농무(農舞) / 신경림 농무(農舞) - 신경림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 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 친들 무엇하랴 비료 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 출전 《창작과 비평》 (1971) ◎시어 풀이 .. 2020. 3. 27.
갈대 / 신경림 갈대 -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 《문학예술》(1956) ▲이해와 감상 1956년 이한직의 추천으로 진보적 성향의 문예지인 《문학예술》을 통해 발표된 시로,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과 비애에 대한 깨달음을 연약한 갈대에 빗대어 형상화한 주지적 서정시이다. 자연을 통해 인간 존재의 고독과 슬픔을 드러내는 이 작품은 갈대를 의인화하여 표현함으로써 주제 의식을 드러내고 있으며, 감각적 이미지를 통해 대상의 상황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4연으로 .. 2020. 3. 27.
파장(罷場) / 신경림 파장(罷場) - 신경림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싯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 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 출처 《농무》(1973) ◎시어 풀이 파장 : 여러 사람이 모여 벌이던 판이 거의 끝남. 시골의 장이 끝나는 무렵. 목로 : 선술집에서 술잔을 놓기 위하여 쓰는 널빤지로 만든 상. 섰다 : 화투 노름의 하나.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어느.. 2020. 3. 26.
길 / 신경림 길 - 신경림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 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것이 다 사람이 만든 길이 거꾸로 사람들한테 세상 사는 슬기를 가르치는 거라고 말한다 길이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어 온갖 곳 온갖 사람살이를 구경시키는 것도 세상 사는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길의 뜻이 거기 있는 줄로만 알지 길이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은 모른다.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에게만 길은 고분고분해서 꽃으로 제 몸을 수놓아 향기를 더하기도 하고 그늘을 드리워 .. 2020. 3. 26.
목계장터 / 신경림 목계장터 - 신경림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 출전 《농무》(1973) ◎시어 풀이 목계 나루:충주 부근 남한강 변에서 가장 번화했던 나루 장터 박가분:여자들의 화장품 방물장수:여자들에게 소용되는 물품을 파는 상인 맵.. 2020. 3. 26.
한(恨) / 박재삼 한(恨) - 박재삼 감나무쯤 되랴 서러운 노을빛으로 익어 가는 내 마음 사랑의 열매가 달린 나무는! 이것이 제대로 벋을 데는 저승밖에 없는 것 같고 그것도 내 생각하던 사람의 등 뒤로 벋어가서 그 사람의 머리 위에서나 마지막으로 휘드러질까 본데. 그러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안마당에 심고 싶던 느껴운 열매가 될는지 몰라! 새로 말하면 그 열매 빛깔이 전생(前生)의 내 전(全) 설움이요 전(全) 소망인 것을 알아내기는 알아낼는지 몰라! 아니, 그 사람도 이 세상을 설움으로 살았던지 어쨌던지 그것을 몰라, 그것을 몰라! ▲이해와 감상 이 시는 감나무를 통하여 임이 살아있을 때, 임에게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 화자 자신의 애절하고 한스러운 마음을 형상화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상황에서 화자는 자기의 간.. 2020. 3. 25.
매미 울음 끝에 / 박재삼 매미 울음 끝에 - 박재삼 막바지 뙤약볕 속 한창 매미 울음은 한여름 무더위를 그 절정까지 올려놓고는 이렇게 다시 조용할 수 있는가. 지금은 아무 기척도 없이 정적의 소리인 쟁쟁쟁 천자(天地)가 하는 별의별 희한한 그늘의 소리에 멍청히 빨려들게 하구나. 사랑도 어쩌면 그와 같은 것인가 소나기처럼 숨이 차게 정수리부터 목물로 들이붓더니 얼마 후에는 그것이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맑은 구름만 눈이 부시게 하늘 위에 펼치기만 하노니. - 출전 《울음이 타는 가을 강》(1991) ◎시어 풀이 별의별 : 보통과 다른 갖가지의. 희한한 : 매우 드물거나 신기한. 목물 : 팔다리를 뻗고 엎드린 사람의 허리 위에서부터 목까지를 물로 씻어 주는 일.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매미의 울음을 통해 사랑의 본질을 탐구하는 시로.. 2020. 3.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