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恨)
- 박재삼
감나무쯤 되랴
서러운 노을빛으로 익어 가는
내 마음 사랑의 열매가 달린 나무는!
이것이 제대로 벋을 데는 저승밖에 없는 것 같고
그것도 내 생각하던 사람의 등 뒤로 벋어가서
그 사람의 머리 위에서나 마지막으로 휘드러질까 본데.
그러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안마당에 심고 싶던
느껴운 열매가 될는지 몰라!
새로 말하면 그 열매 빛깔이
전생(前生)의 내 전(全) 설움이요 전(全) 소망인 것을
알아내기는 알아낼는지 몰라!
아니, 그 사람도 이 세상을
설움으로 살았던지 어쨌던지
그것을 몰라, 그것을 몰라!
▲이해와 감상
이 시는 감나무를 통하여 임이 살아있을 때, 임에게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 화자 자신의 애절하고 한스러운 마음을 형상화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상황에서 화자는 자기의 간절한 그리움과 사랑을 ‘감’을 매개로 삼아 저승에서라도 그 사람에게 전해 보았으면 하는 소망을 지닌다. 그러나 정작 그 사람은 이런 자신의 사랑을 알아주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서러움을 느낀다.
작품의 제목처럼 이 시는 가슴속에는 애타는 사랑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마음을 전달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의 서러움과 한을 노래한 작품이다. ‘감나무’는 화자와 ‘그 사람’을 연결해 주는 매개체로서 ‘감’은 서러움과 그리움으로 응축된 시적 화자의 마음을 의미하고 있다.
1연은 ‘감나무쯤’ 되는 임에 대한 서러운 사랑을 ‘서러운 노을빛으로 익어가는’ 것으로 사랑의 정서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감나무’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그 사랑을 전달하지 못하는 서러움이 응축되어 있는 소재이며 동시에 ‘내 마음 사랑의 열매’는 임에 대한 사랑으로 응축된 화자의 마음이다. 도치법을 사용하여 ‘감나무쯤 되랴’라고 감탄형으로 간결하게 표현하여 서러운 사랑을 극대화하였다.
2연은 감나무를 통해 죽은 임에게 사랑을 전하고자 한다. 화자가 사랑하는 상대가 있는 곳은 죽은 자들의 공간인 저승이기 때문에 이 시는 만날 수 없는 마음속의 그리움을 '한(恨)'으로 표출해 내는 것이다. ‘등 뒤로 벋어 가서/ 그 사람의 머리 위에서나마’는 사랑하는 사람을 직접 찾아가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전달하고 싶은 마음을 표출한 것이다.
3연에서는 자신의 사랑을 알아주지 못할 것 같은 데서 느끼는 서러움을 표현하고 있다. ‘느꺼운 열매가 될는지 몰라!’라는 표현에서 ‘느꺼운 열매’는 화자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인데, ‘될는지 몰라!’라는 것은 그러지 못할 수도 있다는 화자의 회의적인 인식이 깔려있는 것이며, 아울러 ‘그 열매 빛깔’이 ‘내 전 설움이요 소망’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주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에 서러움이 깊어지고 있다.
그리고 화자는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려 하고 '그 사람'의 삶과 사랑도 자신과 같았을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이처럼 화자는 '그 사람'도 이 세상을 서러움 속에서 살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서러움을 지닌 대상을 자신에서 '그 사람'으로 확대하여 한(恨)을 매개로 서로를 연결하고 있다. 이는 우리 문학의 전통적인 주제인 ‘한’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몰라!’라는 감탄형 종결어미를 세 번이나 반복 사용한 것은 화자의 정서를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는 임의 죽음으로 인한 이별을 체념이나 절망의 정서로만 표출하지 않고 감나무를 매개체로 삼아 저승으로 자신의 사랑과 그리움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사랑의 교감을 통해 화자는 저승에 있는 그 사람이 열매를 보며 자신의 설움과 소망을 알아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작자 박재삼(朴在森, 1933~1997)
시인. 일본 동경 출생. 1953년 《문예》에 <강물에서>가 추천되면서 등단했다. 한(恨)이라는 한국의 전통적인 정서를 어학적, 예술적으로 묘사한 작품을 주로 창작하였다. 그의 시에서 자연은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삶과 내재적인 아름다움을 구체화한 완전한 세계의 상징이다. 시집으로 《춘향이 마음》(1962), 《햇빛 속에서》(1970), 《울음이 타는 가을 강》(1987) 등 다수.
<해설 및 정리>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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