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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꽃 피는 시절 / 이성복

by 혜강(惠江) 2020. 3. 30.

 

 

 

 

꽃 피는 시절

 

 

- 이성복

 

멀리 있어도 나는 당신을 압니다.

귀먹고 눈먼 당신은 추운 땅속을 헤매다

누군가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되려 하셨지요.

부르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생각지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당신이 올 때면 먼 발치 마른 흙더미도 고개를 듭니다.

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나를 알지 못하고

나를 벗어나고 싶어 몸부림하지만

내게서 당신이 떠나갈 때면

내 목은 갈라지고 실핏줄 터지고

내 눈, 내 귀, 거덜 난 몸뚱이 갈가리 찢어지고

나는 울고 싶고, 웃고 싶고, 토하고 싶고,

벌컥벌컥 물사발 들이켜고 싶고 길길이 날뛰며

절편보다 희고 고운 당신을 잎잎이, 뱉아 낼 테지만

부서지고 무너지며 당신을 보낼 일이 아득합니다.

굳은 살가죽에 불 댕길 일 막막합니다.

불탄 살가죽 뚫고 다시 태어날 일 꿈같습니다.

지금 당신은 내 안에 있지만

나는 당신을 어떻게 보내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각만 한 손으로 뺏센 내 가슴 쥐어뜯어며 발 구르는 당신

 

                         -시집 그 여름의 끝(1990)

 

 

시어 풀이

 

갈가리 : ‘가리가리의 준말. 여러 가닥으로 갈라지거나 찢어진 모양.
절편 : 떡살로 눌러 모나거나 둥글게 만든 떡.
조막 : 주먹보다 작은 물건의 덩이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뻣센 : 뻣뻣하고 억센.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꽃이 피는상황을 이별의 고통에 빗대어 형상화함으로써 생명 탄생의 고통과 꽃의 강인한 생명력, 그리고 경이로움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는 꽃을 둘러싼 외피(줄기)'', '''당신'으로 설정하여 추운 땅속에서 온갖 시련을 겪으며 헤매다 ''에게 벗어나 하얀 꽃잎으로 피어나는 과정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처럼 어려움을 이겨내는 꽃에 대한 감탄을 바탕으로 꽃의 강인한 생명력을 드러내고 있다.

 

 의인화한 대상과 대화하는 어조로 표현하는 이 시는 경어체를 활용하여 차분하고 경건한 분위기로 시상을 전개하고 있으며, 감각적 묘사를 바탕으로 주제를 형상화하고 있다.

 

 1연은 추운 땅속에서 때를 기다리는 당신을 당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비록 귀먹고 눈먼 채 추운 땅속을 헤매고 있지만, 누군가에게 미소를 짓게 하려는 모습이다.

 

 2연은 꽃 피는 시절이 오면 부르지 않아도 찾아오는 당신을 노래하고 있다. ‘생각지도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는 꽃의 개화가 자연의 순리이고 필연적인 과정임을 의미하며, ‘멀리 있는 발치 마른 흙더미도 고개를 듭니다라는 표현은 흙에서 움이 트는 상황을 감각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3연은 나를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당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지금 내 안에는 지금은 내가 감싸고 있는 상태지만, ‘내 안에 있는당신이 나를 벗고 싶어 하는 것은 곧 꽃의 외피(外皮)를 벗고 싶다는 의미이다.

 

 4~6연에서는 당신이 떠나갈 때의 고통과 당신을 떠나보낼 일에 대한 두려움을 묘사하고 있는데, 꽃을 피워 내기 위해서는 목이 갈라지고 실핏줄이 터지고, , , 몸뚱이 갈가리 찢어지는 시련을 거쳐야 하고, '굳은 살가죽에 불 댕길 일이나 '불탄 살가죽 뚫고 다시 태어날 일'처럼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다. 그만큼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고통과 희생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인식도 함께 드러내고 있다. 그렇지만 그 일은 내게는 부서지고 무너지는 아픔이요, 그래서 꿈만 같은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7연에서 화자인 '지금 당신은 내 안에 있지만/ 나는 당신을 어떻게 보내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의 표현으로 꽃피는 시절의 아득하고 몽환적인 분위기와 어울려 이 시에서 드러나는 고통의 모습을 폭발적으로 확장한다. 그리고 조막한 한 손으로 뻣센 내 가슴 쥐어뜯으며 발 구르는 당신의 표현에는 막 피어나려는 연약한 꽃과 꽃을 감싸고 있는 나무의 외피 사이의 막바지 긴장감이 실감 나게 그려져 있다.

 

 결국, 이 시는 을 피우기 위한 통과 의례로서의 시련과 고통을 적극적이면서도 긍정적인 자세로 이겨내는 꽃의 강인한 생명력을 형상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작자 이성복(李晟馥, 1952 )

 

 

  시인. 경북 상주 출생. 1977문학과 지성<정든 유곽에서>를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섬세하고 평이한 언어로 우리 시대의 정신적 위기를 노래하는 시들을 썼다. 주요 시집으로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1980), 남해 금산(1987)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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