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시(序詩)
- 이성복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 소리 번쩍이며
어두워 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 시집 《남해 금산》(1987)
이 작품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화자의 일상과 관련지어 담담한 어조로 표현하고 있는, 일종의 연애시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일은 쓸쓸하고 허전하기만 하다. 더구나 낯선 곳에서 혼자 저녁을 사 먹어야 할 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더더욱 깊어진다. 이 시는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에 있는 시적 화자가 '맞은편 골목'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알아보기를 소망하고 있는 모습을 통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1연에서 화자는 '간이식당'에서 그것도 '늦고 헐한 저녁'을 먹고 거리로 나선다. ‘늦고 헐한 저녁’은 쓸쓸하고 허허로운 화자의 심리를 드러낸다.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없기 때문이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라는 표현은 낯선 거리에 선 화자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촉각적인 이미지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한 거리에 나선 화자는 그리움으로 인해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 수밖에 없는 '정처 없음'을 숨길 수 없다. 이러한 화자의 그리움은 '당신이 나를 알아볼 때까지' 지속된다.
또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가며 몸 뒤트는 풀밭‘은 공감각적 표현으로서 적막으로 인한 화자의 내적 고통이 심화한 것으로, 이 고통은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추는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로 화자의 쓸쓸함과 서러움을 미학적으로 승화시키는 동시에 화자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시는 애절하고도 쓸쓸한 사랑의 노래이다. 시적 화자의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인 '당신'의 부재(不在)로 인한 결핍된 사랑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사랑을 지배하는 정서는 여전히 쓸쓸함과 서러움이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나를 알아볼 때까지 '정처 없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시인은 이에 머물지 않고 특유의 상상력에 의해 미학적으로 한결 두드러지게 된다.
이성복 시인은 초기 시 이후에 '당신'이라는 가상의 존재를 상정하고 연애시를 많이 써왔다. 그의 연애시는 지나친 감정에서 벗어나 구체적 실감을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리얼리티를 얻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작자 이성부(李盛夫, 1942~2012)
시인. 전남 광주 출생. 1962년 《현대문학》에 <소모(消耗)의 밤>, <열차> 등이 추천되어 등단하였다. 개성 있는 남도적 향토색과 저항적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현실 참여적인 내용을 다루면서도 서정성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을 썼다. 시집으로 《이성부 시집》(1969), 《우리들의 양식》(1974), 《야간 산행》(1996)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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