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西海)
- 이성복
아직 서해엔 가 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거기 계실지 모르겠기에
그곳 바다인들 여느 바다와 다를까요
검은 개펄에 작은 게들이 구멍 속을 들락거리고
언제나 바다는 멀리서 진펄에 몸을 뒤척이겠지요
당신이 계실 자리를 위해
가 보지 않은 곳을 남겨 두어야 할까 봅니다
내 다 가보면 당신 계실 곳이 남지 않을 것이기에
내 가 보지 않은 한쪽 바다는
늘 마음속에서나 파도치고 있습니다
- 시집 《그 여름의 끝》(1990)
*개펄 : 갯가의 개흙이 깔린 벌판.
*진펄 : 땅이 질어 질퍽한 벌.
▲이해와 감상
이 시에서 ‘서해’는 ‘당신’이 있는 곳으로, ‘당신’이 보고 싶지만 ‘당신’을 위해 서해에 가지 않겠다는 역설적인 발상을 통해 ‘당신’에 대한 화자의 간절하고 애틋한 사랑과 그리움을 나타내고 있다.
이 시의 화자는 그리움의 대상으로 ‘서해’라는 특정 공간을 설정하고, ‘당신’을 그리워하지만 ‘당신’을 위해 서해에 가지 않겠다는 역설적인 발상으로 늘 ‘당신’을 사랑하고 그리워한다는 역설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경어체를 사용하여 대상에 대한 존경과 배려를 나타내고 있으며, 도치법, 활유법, 설의법 등을 통해 화자의 정서를 형상화하고 있다.
화자는 1연에서, ‘당신’이 ‘서해’에 계실지도 모르겠기에 아직 가 보지 않았다고 한다. ‘서해’는 ‘당신’이 계실지도 모르는 공간으로, 이 공간을 남겨 둠으로써 화자는 자신의 그리움을 지속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역설적 발상을 통해 독자의 궁금증을 유발하고 있다.
2연에서는 서해가 다른 바다와 다르지 않음을 나타내고 있다. 작은 게들이 검은 개펄 구멍을 들락거리고, 바다는 진펄 위에 몸을 뒤척이는, 여느 바다가 전혀 다를 게 없는 곳이다. 이를 통해 ‘서해’는 ‘당신’이 아니라면 화자가 가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는 곳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3연에서 화자가 서해에 가지 않으려는 구체적인 이유와 다짐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당신’이 머물 자리를 남겨 두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당신’을 배려하는 화자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의 화자는 ‘당신’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는 것을 유보함으로써 오히려 ‘당신’의 존재를 지키고자 하는 역설적인 태도를 보여 준다. 결국 ‘서해’는 ‘당신’이 계실지도 모르는 공간으로, 이 공간을 남겨 둠으로써 화자는 자신의 그리움을 지속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첫 행의 설의법과 마지막 행의 활유법이 바다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다.
화자가 ‘당신’을 항상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은 4연의 마지막 행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가 보지 않은 한쪽 바다는/ 늘 마음속에서나 파도치고 있습니다.’라는 표현은 서해에 가 보지는 않았지만, 거기에 당신이 있을 것이기에 그 바다는 늘 나의 마음속에 있다는 역설이다. 즉, 서해는 당신이 있을지 모르는 공간으로 이 공간을 남겨둠으로써, 화자는 그리움을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신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도치법을 사용하여 표현하였다.
이 시에서 화자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서해의 파도는, ‘당신’에 대한 화자의 그리움의 대상이다. ‘당신’을 위해 서해에 가지 않는 것은 할 수 있어도, 마음속에서 늘 존재하고 있는 서해의 파도만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당신을 향한 그리움만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화자가 ‘당신’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알 수 있다.
시인. 경북 상주 출생. 1977년 《문학과 지성》에 <정든 유곽에서>를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섬세하고 평이한 언어로 우리 시대의 정신적 위기를 노래하는 시들을 썼다. 주요 시집으로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1980), 《남해 금산》(1987)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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