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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세한도(歲寒圖) - 벼루읽기 / 이근배

by 혜강(惠江) 2020. 3. 29.

 

 

 

 

세한도(歲寒圖) - 벼루읽기

 

 

- 이근배  

 

 

1

바람이 세다

산방산(山房山) 너머로 바다가

몸을 틀며 기어오르고 있다

볕살이 잦아지는 들녘에

유채 물감으로 번지는

해묵은 슬픔

어둠보다 깊은 고요를 깔고

노인은 북천을 향해 눈을 감는다

가시울타리의 세월이

저만치서 쓰러진다

바다가 불을 켠다.

 

2

노인이 눈을 뜬다

낙뢰(落雷)처럼 타 버린 빈 몸

한 자루의 붓이 되어

송백의 푸른 뜻을 세운다

이 갈필(渴筆)의 울음을

큰선비의 높은 꾸짖음을

산인들 어찌 가릴 수 있으랴

신의 손길이 와 닿은 듯

나무들이 일어서고

대정(大靜) 앞바다의 물살로도

다 받아낼 수 없는

귀를 밝히는 소리가

빛으로 끓어넘친다.

노인의 눈빛이

새잎으로 돋는다.

- 시집 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2004)


 

시어 풀이

 

볕살 : 내쏘는 햇빛.
해묵은 : 어떤 일이나 감정이 해결되지 못한 상태에서 여러 해를 넘기거나 많은 시간이 지난.
북천 : 북쪽 하늘.
송백 : 소나무와 잣나무.
갈필(渴筆) : 그림을 그릴 때 쓰는, 빳빳한 털로 만든 붓. 붓에 먹물을 슬쩍 스친 듯이 묻혀서 쓰거나 그리는 기법.
큰선비 : 학식과 덕망이 뛰어난 선비.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추사 김정희의 그림 세한도를 모티프로 삼아 귀양지에서 느꼈을 추사 김정희의 슬픔과 절망, 그리고 그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기개를 <세한도>로 그려 내는, 선비로서의 기개와 삶을 형상화하고 있는 시이다.

 

 <세한도>는 추사 김정희가 1840,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유배지에서 그린 그림이다. “논어(論語)”자한(子罕)’ 편에는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彫)”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공자가 한 말로 일 년 중에서 가장 추운 시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그대로 푸름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는 의미이다. ‘세한도는 이러한 내용을 담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김정희는 이 그림을 그려 제자 이상적이 권세를 따르는 세속의 무리와는 달리 변함없는 의리를 보여 준 것에 감격하여 그 보답으로 보냈다고 한다.

 

 따라서, 시인은 어려움 속에서 선비로서의 기개를 잘 드러낸 김정희 그림 <세한도>의 제목을 시의 제목으로 사용하였고, 제주도 유배 당시 추사의 상황과 심정을 상상하여, 추사의 기개가 형상화된 그림의 가치를 표현하고 있다. 이 시에서 제주도 지명인 산방산’, ‘대정등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연에서는 김정희가 귀양지에서 겪는 어려움과 슬픔을 그려 내고 있다. ‘바람이 세다는 유배지의 상황을 상상하여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현실의 가혹한 환경을 말해주며, ‘가시울타리의 세월은 김정희가 유배지에서 보낸 고난과 시련의 시간들을 표현한 것으로 화자는 이를 쓰러진다라고 표현하여 김정희의 좌절을 드러낸다. ‘해묵은 슬픔’, ‘눈을 감는다’, ‘저만치서 쓰러진다는 표현은 모두 귀양지에서 느끼는 김정희의 슬픔과 절망이 나타나는 시구들이다. 하지만 1연 마지막에서 시상의 반전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바다가 불을 켠다.’ 라는 시구를 통해 드러난다.

 

 하지만 불빛의 이미지는 2연에서 노인이 눈을 뜬다로 이어져 결국 김정희가 송백의 푸른 뜻을 세우는’, 즉 세한도를 그릴 수 있도록 하는 힘이 된다. ‘노인’, 김정희1연에서 감았던 눈을 다시 뜨고, ‘낙뢰처럼 타 버린 빈 몸’, 즉 삶의 고통으로 쇠약해진 몸으로 세한도를 그려 낸다. ‘세한도에 그려진, 한겨울에도 변함없는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의 기백은 선비의 우뚝한 기개를 닮아 세파를 받아내던 산조차도 넘어선다. 결국, 세한도를 통해 발현된 김정희의 큰 뜻은 주변을 빛으로 끓어 넘치게하여 김정희 자신의 눈빛도 다시 새잎으로 돋는계기를 마련해 준다.

 

 이 시는 총 2연으로 구성된 작품으로 1연과 2연 사이에 뚜렷한 시상의 전환이 나타난다. 1연에서는 귀양지에서 느끼는 김정희의 슬픔과 절망이 나타나고 있지만, 2연에서 노인이 눈을 뜬다로 이어져 결국 김정희가 송백의 푸른 뜻을 세우는’, 즉 세한도를 그려냄으로써 추사 김정희의 기개와 선비정신을 드러낸 것이다.

 

 

작자 이근배(李根培, 1940 ~ )


 시인. 충남 당진 출생. 1961서울신문신춘문예에 ,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묘비명이 각각 당선해 문단에 데뷔했다. 조선일보신춘문예에 압록강이 입선되어 화제가 되었다. 이후 시조와 자유시 창작을 병행해 왔다. 시집으로 사랑을 연주하는 꽃나무(1960), 노래여 노래여(1981), 한강(1985), 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2004)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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