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香)아
- 신동엽
향아 너의 고운 얼굴 조석으로 우물가에 비최이던 오래지 않은 옛날로 가자
수수럭거리는 수수밭 사이 걸찍스런 웃음들 들려 나오며 호미와 바구니를 든 환한 얼굴 그림처럼 나타나던 석양……
구슬처럼 흘러가는 냇물가 맨발을 담그고 늘어앉아 빨래들을 두드리던 전설 같은 풍속으로 돌아가자
눈동자를 보아라 향아 회올리는 무지개빛 허울의 눈부심에 넋 빼앗기지 말고철따라 푸짐히 두레를 먹던 정자나무 마을로 돌아가자 미끈덩한 기생충의 생리와 허식에 인이 배기기 전으로 눈빛 아침처럼 빛나던 우리들의 고향 병들지 않은 젊음으로 찾아가자꾸나
향아 허물어질까 두렵노라 얼굴 생김새 맞지 않는 발돋움의 흉낼랑 그만 내자 들국화처럼 소박한 목숨을 가꾸기 위하여 맨발을 벗고 콩바심하던 차라리 그 미개지(未開地)에로 가자 달이 뜨는 명절밤 비단 치마를 나부끼며 떼지어 춤추던 전설 같은 풍속으로 돌아가자 냇물 굽이치는 싱싱한 마음밭으로 돌아가자.
- 《조선일보》(1959.11.9.)
◎시어 풀이
수수럭거리는 : 수런거리는
걸찍스런 : 걸쭉한
회올리는 : 타래를 이루어 올라가는
허울 : 실속이 없는 겉모양.
두레 : 농촌에서 공동 작업을 위하여 마을 단위로 만든 조직. 여기서는 ‘둥근 켜로 된 시루떡 덩이’.
인 : 여러 번 되풀이하여 몸에 깊이 밴 버릇
콩바심 : (북한어) 거둬들인 콩을 두드려 콩알을 털어내는 일
▲이해와 감상
이 시의 화자는 ‘향'이라는 시적 대상에게 ’오래지 않은 옛날‘의 고향으로 함께 돌아가자고 애절하게 권유하는 문명 비판적 서정시이다.
화자는 허위와 가식이 판치는 문명사회에서 벗어나 소박하지만 순수하고 공동체적인 삶이 있는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의지를 가지고, ’향아‘라는 청자를 설정하여 말을 건네는 듯한 어투를 사용하여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가자‘, ’돌아가자‘, ’찾아가자꾸나‘ 등 청유형 어미를 여섯 번이나 반복하여 화자의 의지를 강조하고 있으며, 과거와 현재를 대비시켜 주제의식을 드러내고, 비유적 표현과 감각적 표현으로 대상에 대한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1연과 2연에서 화자는 평화롭던 ’오래지 않은 옛날‘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화자가 기억하는 ’오래지 않은 옛날‘은 ’향아‘가 물 깃던 우물과 수런거리는 수수밭 사이에서 뛰놀던 아이들의 웃음이 있고, ’향아‘와 같은 가시네들 얼굴처럼 떠오르는 석양이 아름다운 곳이다. 청각과 시각적 이미지로 보여주는 옛날의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는 평화로운 세계로 묘사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3연은 ’전설과 같은 풍속‘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소박하고 정겹던 모습들이 전설이 되었다는 말속에서 현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엿볼 수 있다.
4연은 가식과 허식이 있는 ’병들지 않은 젊음‘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화자는 첫 마디 ’눈동자를 보아라 향아‘라는 표현으로 시상을 일깨우고 나서 두 세계를 대비시킨다. 화자는 현대 문명사회를 ‘무지갯빛 허울의 눈부심'과 ‘기생충의 생리와 허식'이 도사리는 부정적인 세계로 인식하고, ’두레를 먹던 정자나무 그늘‘과 ’병들지 않은 젊음‘, 즉 현대의 문명에 찌들지 않은 순수함을 간직한 과거로 돌아가자고 한다. 화자가 지향하는 과거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행복한 웃음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정겨움, 그리고 활력이 넘치는 곳이다.
5연은 전설 같은 풍속이 있는 순수한 세계로 돌아가기를 소망하고 있다. 문명에 물드는 것을 두려워하는 화자는 ’얼굴 생김새 맞지 않는 발돋움의 흉내‘ 같은 가식적인 모습과 ’기생충의 생리와 허식‘에 더 이상 물들기 전에 ’맨발 벗고 콩바심하던‘ 미개지, ’전설 같은 풍속‘ ’싱싱한 마음밭‘으로 돌아가자고 호소한다. 부정적 현실과 이상적 세계를 극명하게 대비시켜 주제 의식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결국, 이 시는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을 통해 참다운 인간성의 회복을 추구하는 문명 비판적 성격을 띤 작품이다.
▲작자 신동엽(申東曄, 1930-1969)
시인. 충남 부여 출생.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장시 <이야기하는 쟁이군의 대지>가 석림(石林)이라는 필명으로 당선, 등단하였다.
민족 현실에 대한 치열한 의식을 바탕으로 한 시를 발표하였다. 민족 고통을 전제로 한 참여적 경향의 시와 분단 조국의 현실적 문제에 관심을 표명한 서정시와 서사시를 썼다. 시집에 《아사녀》, 《금강》,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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