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무(農舞)
- 신경림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 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 친들 무엇하랴
비료 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 출전 《창작과 비평》 (1971)
◎시어 풀이
꺽정이 : 조선 명종 때의 의적.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의 주인공.
서림이 : 소설 ‘임꺽정’에 나오는 임꺽정의 참모. 후에 관군에게 붙잡혀 임꺽정을 배신한 인물.
해해대지만 : 입을 조금 벌리고 경망스럽게 자꾸 웃지만.
쇠전 : 우시장
도수장 : 도살장. 고기를 얻기 위하여 가축을 잡아 죽이는 곳.
날라리 : ‘태평소’의 잘못.
▲이해와 감상
이 시는 1970년대 농민시의 대표작으로 피폐한 농촌의 현실과 농민의 울분을 사실적이고 극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시인은 ‘농무’를 추는 농민들의 모습을 통해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농촌의 암담한 현실, 이로 인한 농민의 절망감과 울분 등을 그려 내고 있다.
본래 ‘농무(農舞)’는 농민들이 힘겨운 노동의 피로를 풀기 위하여 일종의 ‘놀이’로 즐기는 춤이지만, 여기서는 산업화 과정에서 피폐한 농촌 현실에 대한 노인들의 분노와 한을 떨쳐내려는 행위로 그려지고 있다.
가설무대의 공연이 끝나고, 학교 앞 소줏집에 모여 술을 마시는 농민들에게 밀려오는 것은 허탈감뿐이다. 삶에 대한 그들의 인식은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라는 구절에 극명하게 나타나 있다. ‘꽹과리를 앞세워 장거리로’ 나선다. 농악 한 판을 벌이기위해서다. 구경꾼은 ‘쪼무래기’와 ‘처녀애들’뿐, 젊은이들은 모두 도시로 떠나 아이들과 여자만 남은 농촌의 서글픈 현실을 보여준다.
아이들 중에는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 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고 외친다. 이것은 농촌의 현실이 조선 명종 때의 소설 ’임꺽정‘ 속의 현실을 비유적으로 결합해 볼 때 별 차이가 없다며 울분을 토하는 것이지만, 현실적 모순에 저항하는 ‘임꺽정’을 통해 농민들의 적극적인 저항 의지를 나타내려는 의도도 드러내 준다.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라는 구절은 피폐한 농촌 현실에 대한 농민의 자조적 한탄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허탈감과 원통함, 울분을 안고 농무를 추면서 ‘쇠전을 거쳐 도수장’까지 이르게 되는데, 여기에서 그들이 지닌 한(恨)은 ‘신명’으로 전환된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신명’은 분노를 삭이면서 춤추는 농민의 한과 슬픔이 역설적으로 고양된 것이다.
시가 전개되는 과정에 등장하는 학교 운동장, 소줏집, 장거리, 쇠전, 도수장 등 이 시가 이동하는 공간은 모두 농촌의 비극적 현실을 인식하는 곳으로 농민들의 허탈감과 분노와 울분, 체념을 표출하는 곳들이다. 따라서 겉으로 흥겨운 축제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이 시는 당대의 사회적 현실을 문학적인 방식으로 고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우리는 농민들의 처절한 몸짓을 보며 자연스럽게 그들의 울분과 한의 정서에 공감하게 된다.
1960, 70년대 한국 사회는 큰 변화에 직면했다. 근대화를 주도하였던 정부는 공업화·산업화 정책을 채택하였고, 이에 따라 농업·농촌은 한국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났다. 농사를 짓던 땅이 공장 대지로 잘려 나가고, 저곡가 정책에 따라 농민들은 그들의 피와 땀이 바쳐진 농작물은 생산비에도 못 미치는 싼값에 내다 팔아야 했고, 이를 견디지 못한 농민들은 도시로 이주하여 도시의 주변부에서 빈민층을 형성하거나 싼값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도시 노동자로 전락하였다. 그야말로 농촌은 피폐의 길을 걸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인들은 농촌을 배경으로 농부들의 고뇌와 울분을 토하는 참여시를 썼다. 신경림 시인은 그중의 하나였다.
▲작자 신경림(申庚林, 1936 ~ )
시인. 충북 충주 출생. 1955년 《문학예술》에 <갈대>, <묘비>, <낮달>이 추천되어 등단하였다. 1973년에 펴낸 첫 시집 〈농무(農舞)〉는 우리 민족의 정서가 짙게 깔린 농촌 현실을 기초로 하여 민중들과 공감대를 이루는 시로 평가받고 있다.
시집으로 《농무》(1973), 《새재》(1979), 《달넘세》(1985), 《남한강》(1987), 《우리들의 북》(1988), 《길》(1990) 등이 있다. 주로 농촌을 배경으로 우리의 현실과 한, 울분, 고뇌 등을 다룬 시를 썼다.
<해설 및 정리>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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