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수(刺繡)
- 허영자
마음이 어지러운 날은
수(繡)를 놓는다.
금실 은실 청홍실 따라서 가면
가슴 속 아우성은 절로 갈앉고
처음 보는 수풀
정갈한 자갈돌의
강변에 이른다.
남향 햇볕 속에
수를 놓고 앉으면
세사번뇌(世事煩惱)
무궁(無窮)한 사랑의 슬픔을
참아 내올 듯
머언
극락정토(極樂淨土) 가는 길도
보일 성싶다.
- 시집 《가슴엔 듯 눈엔 듯》(1966) 수록
자수(刺繡) : 옷감이나 헝겊 따위에 여러 가지의 색실로 그림, 글자, 무늬 따위를 수놓는 일.
세사번뇌(世事煩惱):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로 인한 마음의 괴로움
무궁(無窮):공간이나 시간 따위가 끝이 없음.
이 작품은 시적 화자의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 심리 상태가 자수라는 매개를 통해 세상 번뇌와 사랑의 슬픔을 다스리고 마음의 평화를 찾아가는 체험을 노래한 작품이다. 내면적으로 성숙되어 가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의 제목이자 핵심 소재인 ‘자수’는 시인에게 있어 실제적인 수 놓기라기보다는 고뇌를 견디는 방법이요, 극기(克己)의 상징으로 쓰이고 있다. 사랑의 슬픔 때문에 번뇌에 휩싸인 화자는 ‘자수’를 통해 마음을 정갈하게 가라앉히게 된다. 따라서 ‘수’는 화자가 번뇌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1~3연의 시행 구조가 4~6연에서 반복되며, 형식적 안정감을 주고 있다. 그러나 의미상으로는 세 단락으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 단락은 1연으로 ‘마음이 어지러운 날은/ 수를 놓는다’는 표현에서 보듯이, 화자가 수를 놓는 일이 어떤 실용적 목적이 아니라 마음속의 고뇌나 슬픔을 가라앉히기 위한 것임을 알려 주고 있다.
두 번째 단락은 2∼3연으로 오랜 번민을 가라앉히고 아름답고 평화로운 심경에 다다르는 수 놓기의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금,은 청홍의 색실을 따라 화자가 수를 놓다 보면, 번뇌는 사라지고, 어느덧 ‘처음 보는 수풀’이나 ‘정갈한 자갈돌의 강변’에 이른다. 그곳은 화자가 수를 놓으면서 되찾게 된 마음의 평화를 의미한다. 시각적인 표현이 인상적이다.
세 번째 단락은 4∼6연으로 수를 놓고 있으면 세상살이의 모든 괴로움(세사번뇌)도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도 이겨 내고 번뇌로부터도 완전히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소망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화자는 수를 놓는 행위를 통해 아픔을 극복하고 ‘극락정토’로 표현된 절대적 구원의 경지에 이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결국, 이 시는 ‘마음이 어지러운’, ‘가슴 속 아우성’, ‘세사번뇌(世事煩惱)’와 ‘무궁한 사랑의 슬픔’으로 표현된 화자의 갈등이 사랑의 슬픔으로 인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게 되는데, 화자는 ‘수 놓기’를 통해 사랑의 슬픔으로 인한 번뇌를 극복하고 ‘극락 정토’의 경지에까지 이르고자 하는 것이다.
불교적인 배경이 바탕으로 한 이 시는 여성적인 섬세함과 강렬한 생명력이 결합된 시풍이 특징인 허영자의 대표작으로 여성적인 소재와 언어와 감성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여성들의 일상에서 체험하는 자수라는 소재에 여성의 풍부한 감성을 결합하여 자신의 삶을 보다 깊이 있게 성찰하며, 슬픔과 번뇌로부터 벗어나 순수한 삶을 살고픈 마음을 효과적으로 표현하였다.
시인. 경남 함양 출생. 1961년 《현대문학》에 〈도정연가(道程戀歌)〉, 〈연가 3수〉, 〈사모곡〉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사랑과 오뇌의 시, 모순과 절망의 시를 썼으나 결코 지향성과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고 동양적인 그윽하고 섬세한 정적 세계를 아름답게 형상화하여 정신적인 초극과 절제를 보여주는 시를 썼다.
시집으로 《가슴엔 듯 눈엔 듯》(1966), 《친전(親殿)》(1972), 《어여쁨이야 어찌 꽃뿐이랴》(1977), 《빈 들판을 걸어가면》(1984), 《그 어둠과 빛의 사랑》(1985), 《조용한 슬픔》(1990), 《기타를 치는 집시의 노래》(1995), 《목마른 꿈으로써》(1997)이 있다.
/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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