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성숙 / 고재종

by 혜강(惠江) 2020. 4. 11.

 

 

 

 

 

성숙

 

 

- 고재종

 

 

 

바람의 따뜻한 혀가
사알작, 우듬지에 닿기만 해도
갱변의 미루나무 그 이파리들
짜갈짜갈 소리날 듯
온통 보석 조각으로 반짝이더니

 

바람의 싸늘한 손이
씽 씨잉, 싸대기를 후리자
갱변의 미루나무 그 이파리들
후둑후두둑 굵은 눈물방울로
온통 강물에 쏟아지나니

 

온몸이 떨리는 황홀과
온몸이 떨리는 매정함 사이
그러나 미루나무는
그 키 한두 자쯤이나 더 키우고
몸피 두세 치나 더 불린 채

 

이제는 바람도 무심한 어느 날
저 강 끝으로 정정한 눈빛도 주거니
애증의 이파리 모두 떨구고
이제는 제 고독의 자리에 서서
남빛 하늘로 고개 들 줄도 알거니

 

 

- 시집 날랜 사랑(1995)

 

 

시어 풀이

 

우듬지 : 나무의 꼭대기 줄기

정정한 : 반짝반짝 빛나는

애증 : 사랑과 미움

 

 

이해와 감상

 

 

 1995년에 발표된 고재종의 이 시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한 생명체가 오랜 시간을 살면서 경험하기 마련인 고통과 환희의 감정들을 성숙이라는 관점에서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시의 중심 제재는 강변의 미루나무이다. 시인은 자신의 일상생활의 반경 안에 위치한 한 그루의 미루나무를 지켜보면서 성숙이라는 인간적 가치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성숙이란 무엇일까? 우리의 상식과 달리 성숙이란 신체적인 발육 상태나 나이를 먹는 것으로 설명되지 않는 어떤 가치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 한에서 성숙늙음이나 성장과 분명하게 구별된다.

 

 이 시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미루나무의 성장 과정을 통해 성숙한 인간에 이르는 삶의 방식을 성찰하고 있다. 감각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생동감과 현장감을 나타내고 있으며, ‘짜갈짜갈’, ‘후득 후드득등 음성상징어를 사용하여 생동감과 현장감을 주고 있다. 전체 420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용에 있어서도 기---결의 분명한 변화 과정을 드러내고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시간과 경험이다. 이 시의 1연은 미루나무가 봄 햇살을 받으며 황홀을 경험하는 순간을, 2연은 싸늘한 바람에 노출되어 매정함을 경험하는 순간을 각각 노래하고 있다. 이러한 대립적 이미지를 통해 시인이 말하려는 것은 좋음과 나쁨, 기쁨과 슬픔, 희열과 고통처럼 생명체에게 가해지는 극단적인 경험이다. 이러한 극단적 경험은 3연에서 합쳐서 성숙의 이미지로 재규정되고, 4연에서는 이런 성숙을 거친 미루나무의 고독한 모습을 통해 성숙한 인간에 이르는 길을 성찰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1연은 바람의 따뜻한 혀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을 배경으로 한 듯하다. 봄이 되자 따뜻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그 바람이 강변에 선 미루나무 그 이파리들에 닿고’, 바람을 맞은 이파리들은 짜갈짜갈하는 특유의 소리를 내며 보석처럼 반짝인다. 이 상황을 3연에 등장하는 시어로 정리하면 황홀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삶이 그렇듯이 성숙은 밝은 환희의 경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거기에는 환희만큼이나 격렬한 고통의 경험들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2연의 첫 행에 등장하는 바람의 싸늘한 손1연의 바람의 따뜻한 혀와 대비되는 것으로, 미루나무에게 닥친 고통의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추운 계절이 도래하여 바람이 미루나무를 뒤흔든다. 시인은 바람을 맞아 이파리가 떨어지는 모습을 미루나무가 후둑 후두둑 굵은 눈물방울을 강물에 쏟아낸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이 상황을 3연에 등장하는 시어로 정리하면 매정함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3연은 황홀매정함을 모두 경험한 미루나무에 관한 이야기이다. 미루나무는 따뜻한 바람과 차가운 바람을 모두 맞고 견디면서 시간을 보내면서 키가 한두 자쯤 더크고 몸집도 두세 치나 더불어났다. 시인의 눈에 비친 미루나무는 황홀매정함의 시간을 지나면서 내적으로 성장했다.


  4연은 바로 그렇게 성장한 미루나무 이야기이다. 시인은 어느 날 애증의 이파리 모두 떨구고/ 이제는 제 고독의 자리에 서서 남빛 하늘로 고개를 들 줄아는 미루나무를 목격한다. 한 번도 그 자리를 떠난 적이 없는 미루나무, 그러나 시인에게 그것은 이미 예전의 미루나무가 아니다. ‘황홀매정함을 모두 견디며 살아온, 그리하여 성숙을 거친 존재에게서 느껴지는 성숙한 태도일 것이다. 이제 성숙한 미루나무는 더 성장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고독의 자세로 의연하게 하늘을 올려다보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이 시에서 고독은 슬픔의 흔적이 아니라 성숙의 표지인 것이다.

 

 시인은 이런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것이 미루나무만의 문제가 아니라 성숙한 인간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가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단계임을 깨닫고 있다. 인간의 성장 과정은 수많은 경험을 통해 구성된다. 우리는 때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쁜 순간을 맞이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말문이 막히는 고통에 신음하기도 한다. 성숙한 삶이란 이런 굴곡과 높낮이의 시간을 모두 견뎌낸 다음에 도달하는 어떤 지점이 아닐까?

 

 

작자 고재종(高在鍾, 1957 ~ )

 

 

 시인. 전남 담양 출생. 1984실천문학신작 시집 <시여 무기여>동구 밖 집 열 두 식구>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지금까지 주로 농촌의 풍경과 삶을 배경으로 현실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을 담은 작품을 발표했다. 절제된 언어 표현과 토속어 구사, 음악성을 특성으로 하는 시를 주로 창작해 왔다. 16회 소월시문학상 대상을 수상하였다.

 

 시집으로 바람 부는 솔숲에 사랑은 머물고(1987), 새벽 들(1989), 쌀밥의 힘(1991), 사람의 등불(1992), 날랜 사랑(1995), 사람의 길은 하늘에 닿는다(1996),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1997), 그때 휘파람새가 울었다(2001). 쪽빛 문장(2004) 등이 있다.

 

 

 

*해설 / 남상학 (시인)

 

 

 

'문학관련 > - 읽고 싶은 시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첫사랑 / 고재종  (0) 2020.04.11
날랜 사랑 / 고재종  (0) 2020.04.11
성묘 / 고은  (0) 2020.04.11
머슴 대길이 / 고은  (0) 2020.04.10
선제리 아낙네들 / 고은  (0) 2020.04.1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