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음이 타는 가을 강
-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 《춘향이 마음》(1962)
이 작품은 노을이 물든 가을 강을 바라보면서 애상감에 젖는 화자를 통해 인생의 유한성으로 인한 서러움과 한(恨)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은 노을에 물든 강을 본 화자가 인생의 고단함과 삶의 유한성이라는 인간의 본원적인 한을 담아내기 위해, 붉은 노을이 지는 강을 ‘울음이 타는 강’이 라고 표현한 것이다.
3연으로 된 이 시는 점층적으로 시상이 전개되는데, 1연에서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서러움을, 2연에서는 사라지는 황혼 녘의 풍경을, 3연에서는 심화된 서러움의 정서를 노래한다.
1연에서 화자는 저녁노을에 물든 가을 강을 바라보며 친구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떠올린다. 가을이 주는 쓸쓸한 정서와 친구의 사랑 이야기로 인해 화자는 서러움을 느낀다. 친구의 사랑 이야기와 계절이 주는 쓸쓸한 정서로 인해 자신의 삶에 대해 한스러움이 자연스럽게 상기되는 것이다. ‘눈물 나고나’의 ‘나고나’는 ‘나는구나’의 전통적인 어조로 애수 어린 분위기를 형성한다.
2연에서는 큰집에 모이는 불빛과 해질녘 노을 진 강이 대조적 이미지로 제시되어 이런 서러움의 정서가 심화한다. 여기서 화려한 불빛보다 서러운 노을빛이 더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인생의 본원적 서러움을 강이 보여 주기 때문이다. 특히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이라는 표현에서 저녁노을이 울음으로 환치되어 화자의 서러운 정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제삿날’은 죽음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인간은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인식하게 되고,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은 저녁노을에 물든 강을 공감각적(시각의 청각화)으로 표현한 것이다. ‘보것네’ 역시 앞의 ‘~고나’와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어조로 예스런 정감을 살리고 애수 어린 분위기를 조성하여 긴 여운을 남긴다.
3연에서는 서러움의 정체가 좀 더 구체적으로 심화한다. 그것은 인생의 유한성에 대한 근원적인 한(恨)인데, 보편적인 자연 현상(강물의 흐름)을 통해 화자의 삶의 희로애락이 비유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네보담도 내보담도’는 너의 서러움보다도, 나의 서러움보다도 가을강은 훵씬 더 서럽다는 인식의 표현이며,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는 로맨틱한 청년 시절이 지나감을 의하며,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는 사랑의 좌절로 인해 슬픔을 느끼는 중년 시절이 지나감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은 인생의 유한함을 뼈저리게 느끼는 노년 시절에 이른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소리 죽은 가을 강’은 한의 정서를 안으로 삭이는 것이다.
즉, 이 시의 화자의 정서는 1연에서 발단하여 2연에서 고조되다가 3연에서는 절정에 달하는 의미의 심화 과정을 이루고 있다. 화자는 먼저, ‘친구의 사랑 이야기’에서 출발하여 ‘울음이 타는 강’을 거쳐 ‘소리 죽은 가을 강’으로 시상을 고조시켜 결국 인간의 유한성과 한(恨)의 정서를 끌어내고 있다. 이러한 점층 현상은 '불빛도 불빛이지만', '저것봐, 저것봐', '네보담도 내보담도'와 같은 시어의 반복이 주는 리듬 효과와 조화를 이루어 주제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키는데 일조하였다.
여기서도 시인은 ‘물’과 ‘불’이 지니는 소멸의 이미지를 이용하여 인간의 본원적인 한(恨)을 효과적으로 드러내었고, ‘울음이 타는 가을 강’으로 대표되는 ‘물’의 이미지가 청각적 심상을 통해 소멸성을 드러내는 한편, ‘해질 녘 울음이 타는’으로 대표되는 ‘불’의 이미지는 시각적 심상을 통해 소멸성을 부각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
시인. 일본 동경 출생. 경남 삼천포에서 성장했으며, 고려대 국문과를 중퇴했다. 현대문학사, 대한일보사, 삼성출판사 등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1953년 시 <강물에서>가 모윤숙에 의해 《문예》에서 추천되고, 1955년 시 <정적>이 서정주에 의해 《현대문학》에 추천되었으며, 같은 해 시조 <섭리>가 유치환에 의해 《현대문학》에 추천됨으로써 추천을 완료하였다.
1962년 첫 시집 《춘향이 마음》을 간행한 이래 시집 《햇빛 속에서》(1970), 《천년의 바람》(1975), 《어린 것들 옆에서》(1976), 《추억에서》(1983), 《내 사랑은》(1985), 《대관령 근처》(1985), 《사랑이여》(1987), 《울음이 타는 가을 강》(1987), 《다시 그리움으로》(1996), 《사랑하는 사람을 남기고》(1997) 등 다수의 시집과 시 선집을 간행하였다. 수필집으로는 《울밑에 선 봉선화》(1986), 《슬픔과 허무의 그 바다》(1989) 등이 있다.
그의 시 세계는 한국 서정시의 전통적 음색을 재현하면서 소박한 일상생활과 자연에서 소재를 찾아 애련하고 섬세한 가락을 노래했다. 그의 시에서 자연은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삶과 내재적인 아름다움을 구체화한 완전한 세계의 상징이다.
<해설 및 정리>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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