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시(軟柹)
- 박용래
여름 한낮
비름잎에
꽂힌 땡볕이
이웃 마을
돌담 위
연시로 익다
한쪽 볼
서리에 묻고
깊은 잠 자다
눈 오는 어느 날
깨어나
제상 아래
심지 머금은
종발로 빛나다
<시어 풀이>
제상(祭床) : ‘제사상’의 준말
종발 : 중발보다 작고 종지보다 조금 넓고 평평한 그릇.
▲이해와 감상
이 시는 감이 한여름의 땡볕에 붉어지고 가을 서리에 익어 눈 오는 겨울 어느 날 밤 제상(祭床)에 오르는 과정을 그리면서, 연시의 충만한 생명력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형상화한 작품이다. 시인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감을 통해 자연의 순리를 관조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단 2개의 문장을 총 14행으로 배열하여 전체적으로 언어의 절제와 표현의 간결성을 추구하여 압축미를 확보했다. 전반부 문장의 주어는 ‘땡볕’, 서술어는 ‘익다’이고, 후반부 문장의 주어는 생략된 ‘감’이고, 서술어는 ‘빛나다’인데, 전반부의 주어인 ‘땡볕’에 연결됨으로써 내용이나 형식이 고도의 치밀성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를 행을 구분하지 않고 풀어 늘어놓으면 이렇다. 여름 한낮 비름 잎에 꽂힌 땡볕이 이웃 마을 돌담 위의 감나무 가지에서 연시로 익는다. 이렇게 익은 연시는 늦가을에 내리는 서리를 맞으며 깊은 잠에 빠지듯 익어간다. 그러다가 눈 오는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제사상 아래 제기로 쓰이는 그릇(종발)에 올려져 그 자태를 뽑낸다.
내용은 간단하지만, ‘여름 한낮’(여름)에서 ‘서리에 묻고’(가을)을 거쳐 ‘눈 오는 어느 날’(겨울)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상을 전개하고, ‘비름 잎’의 녹색과 ‘연시’, ‘볼’의 붉은색의 회화적 이미지를 통해 한 폭의 생동하는 소묘를 연상케 한다. 또한, ‘깊은 잠자다’의 하강 이미지와 ‘깨어나’의 상승 이미지를 대비하여 주제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앞서 말한 대로 절제된 언어와 간결한 표현이 압축미를 돋보이게 한다.
▲작자 박용래(朴龍來, 1925~1980)
충남 논산에서 출생하여, 1955년 《현대문학》에 <가을의 노래>로, 이듬해 <황토길>, <땅>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나왔다.
《네이버 백과, ‘1960년대를 눈물로 건너간 시인, 박용래朴龍來’ - 장석주》를 참고로 하여 등단 이후, 시인 박용래의 인생과 문학을 정리해 본다. 대전의 철도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박용래는 1956년 겨울, 독신으로 살리라던 결심을 풀고 대전간호학교 출신인 이태준을 만나 결혼한다. 그는 결혼 뒤에도 이 학교 저 학교로 전전하다가 1965년 송악중학교를 마지막으로 교직에서 물러난다. 이로써 간호원인 아내가 생계를 도맡고, 그는 스스로 ‘청시사(靑枾舍)’라고 이름 붙인 마당에 상추, 아욱, 대추, 라일락, 감나무 등을 심어 가꾸며 전업 시인으로 들어앉는다.
그는 문단 생활 25년 동안 1백여 편의 작품만을 남길 정도로 과작(寡作)이었으며, 역사의 격동이나 시류에 상관없이 자신만의 세계, 서정의 세계를 고집했다. 문단에 나온 이래 줄곧 유년기에 대한 회상, 우리 농촌의 시정, 애틋한 정한을 시 속에 풀어낸 것이다. 당대의 사회 현실이 휘발된, 한국적 정한의 세계에 대한 집요한 편애를 놓고는 감상적이고 현실 도피적이라는 비난이 받기도 했지만, 반면 현대사회에서 소멸되고 있는 토착과 전통에 생명을 불어넣었다는 찬사로 평가가 엇갈린다.
1960년대에 향토적 서정이 물씬한 시 세계를 일궈낸 시인이 박용래는 응축과 생략의 단형시로 일관하는 시적 특질을 잘 드러내 보였다. 그의 시에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1960년대의 농촌의 거덜난 살림살이와 같은 사회 현실은 애당초 깃들일 여지가 없었다. 원형으로서의 고향, 그의 고향에는 당대의 숨결이 빠져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당대의 현실에서 비롯되는 실감의 부피가 없다고 꼬집었다.
위의 「연시」에서도 볼 수 있듯이 박용래는 대개 10행 내외의 단시를 주로 쓰는데, 그의 시에서는 기교를 거느린 비유법과 언어를 절제한 극도의 압축미가 두드러진다. 깎아낼 대로 깎아내 간결하기 이를 데 없는 언어의 경제도 놀랍지만, 그 안에 새겨진 토착적 정서는 시릴 정도로 선명하다. 이것이 지나쳐 때로는 시적 감동을 도중에서 차단하는 느낌도 주지만, 이것이 박용래 시의 가장 큰 특징이다. 한 가지 종결형만 쓰면서 한 마디 군소리 없이 시행을 이어간 다음과 같은 시도 눈에 띈다.
그의 작품 세계는 오로지 전원적·향토적 서정의 세계를 심화, 확대한 것이 특징이며, 언어의 군더더기를 배제하여 압축의 묘미를 보여주는데 있었다. 이런 그의 특징들은 <저녁눈>, <겨울밤>, <꽃물>, <연시>, <구절초>, <꽃물>, <울타리 밖>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시집으로 《싸락눈》(1969), 《강아지풀》, 《백발(百髮)의 꽃대궁》, 유고시집 《먼 바다》(1984)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우리 물빛 사랑이 풀꽃으로 피어나면》(1985)이 있다.
<해설 및 정리>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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