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다음블로그 '혼자 가는 길'>
추억에서
- 박재삼
진주(晋州) 장터 생어물전(生魚物廛)에는
바다 밑이 깔리는 해 다 진 어스름을,
울 엄매의 장사 끝에 남은 고기 몇 마리의
빛 발(發)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
은전(銀錢)만큼 손 안 닿는 한(恨)이던가
울 엄매야 울 엄매,
별밭은 또 그리 멀리
우리 오누이의 머리 맞댄 골방 안 되어
손 시리게 떨던가 손 시리게 떨던가,
진주(晋州) 남강(南江) 맑다 해도
오명 가명
신새벽이나 밤빛에 보는 것을,
울 엄매의 마음은 어떠했을꼬,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이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인가.
- 출전 《춘향이 마음》(1962)
생어물전 : 생선을 파는 가게.
울 엄매 : ‘우리 엄마’의 경상도 사투리.
은전 : 은으로 만든 돈.
신새벽 : 아주 이른 새벽.
옹기전 : 옹기그릇을 파는 가게.
이 작품은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힘겨운 삶을 살았던 어머니의 슬프고 한스러운 삶을 절제된 어조와 향토적인 시어와 감각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그려 낸 서정시이다.
이 시의 화자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생선을 팔러 장에 나간 엄마를 기다리던 때를 떠올리고 어머니에 대한 연민을 드러낸다. 그 어머니는 ‘진주 장터’에서 어린 자식들을 위해 ‘어스름’이 바다 밑으로 깔리는 늦은 시간까지 생선을 판다. ‘남은 고기 몇 마리의/ 빛 발하는 눈깔’은 다 팔지 못한 고기의 눈깔로 어머니의 가난한 삶과 그로 인한 어머니의 한(恨)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은전만큼 손 안 닿는’ 즉, 신통치 않은 돈벌이로 근근이 사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울 엄매야 울 엄매야’는 ‘우리 엄마’와 ‘우는 엄마’로 두 기지 해석이 가능하며, 반복하여 표현함으로써 어머니의 한을 강조하고 있다.
화자는 한 서린 어머니를 회상하다가 문득 추위에 떨며 어머니를 기다리던 오누이의 슬픔을 떠올린다. ‘별밭은 또 그리 멀리’에서 ‘별밭’은 화자를 포함한 오누이가 소망하는 대상으로, 생존과 애정의 근원이 되는 어머니의 존재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늦은 시간에도 오지 않아 오누이는 골방 안에서 추위와 배고픔으로 떨고 있다. ‘오누이의 머리 맞댄 골방’은 화자의 가난했던 삶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손 시리게 떨던가’는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어머니를 애타게 기다리는 모습을 촉각적 이미지의 반복과 영탄으로 강조하고 있다.
4연은 어머니의 가난한 삶과 한을 그려 내고 있다. 어머니는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일하는 고달픈 하루를 살아가고 있음을 ‘신새벽이나 별빛에 보는’으로 것으로 표현하고, 고된 삶으로 인한 어머니의 한과 슬픔을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이/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으로 간접적으로 표현하였다. 이것은 집으로 돌아오는 어머니가 별을 보고 느꼈을 심정을 보여 주는 부분인데, 달빛을 받은 옹기의 표면이 반짝거리는 것에서 어머니의 눈물을 연상함으로써 고된 삶으로 인한 어머니의 한과 슬픔을 그려 내는 것이다. 특히,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은 눈물을 의미하는 것으로 어머니의 깊은 한(恨)이 응축된 것이다.
이 시는 가난한 삶을 살았던 어머니의 한(恨)과 슬픔이 이 시의 주된 정조를 이루는데, 이러한 정조는 시각적 이미지의 시어들을 통해 효과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즉, 새벽부터 밤늦도록 장터에서 생선을 파는 어머니의 고된 삶과 그 어머니를 기다리며 추위와 외로움에 떨던 오누이의 모습을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로 제시함으로써, 가난한 삶으로 인한 어머니의 슬픔과 한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감정을 절제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특히 ‘울 엄매야 울 엄매’라는 경상도 사투리는 토속적이고 향토적인 정감을 불러일으키며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또 ‘한(恨)이던가’, ‘떨던가’, ‘어떠했을꼬’, ‘것인가’ 등에서 직설적이며 단정적 느낌을 주는 종결 어미 대신 의문형 종결 어미를 사용하여 시인은 자신의 한스러운 회상을 직접 토로하지 않음으로써, 지나친 감상에 빠지지 않고 감정을 절제하는 효과를 얻고 있다.
▲작자 박재삼(朴在森, 1933~1997)
1933년 4월 10일 일본 도쿄에서 출생. 경남 삼천포에서 성장, 고려대 국문과 중퇴. 1953년 시 <강물에서>가 《문예》에 추천되고, 1955년 《현대문학》에 시 <정적>과 시조 <섭리>가 추천되었다.
그의 시세계는 <춘향이 마음>과 <울음이 타는 가을 강> 등으로 대표되는데, 그는 이런 시들을 통해 소박한 일상생활과 자연을 애련하면서도 섬세한 가락으로 노래함으로써 한국 서정시의 전통적 음색을 재현하였다. 그의 시에 있어서 자연은 삶의 이치를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는, 영원하고 지순한 아름다움의 세계이다. 특히 그의 시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어체의 어조와 잘 조율된 율격은 그의 시의 아름다움과 자연스러움을 보장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전반적으로 그의 시 세계는 고전적인 정서의 세계와 향토적인 감각으로 일찍부터 전통시의 영역을 확대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62년 첫 시집 《춘향이 마음》을 간행한 이래 《햇빛 속에서》(1970), 《천년의 바람》(1975), 《어린 것들 옆에서》(1976), 《추억에서》(1983), 《아득하면 되리라》(1984), 《내 사랑은》(1985), 《대관령 근처》(1985), 《찬란한 미지수》(1986), 《바다 위 별들이 하는 짓》(1987), 《박재삼 시집》(1987), 《사랑이여》(1987), 《울음이 타는 가을 강》(1989) 등 다수의 시집과 시선집을 간행하였다.
<해설 및 정리>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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