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다음블로그 '달빛과 바위'-북한화가 김성규의 '장수산 첫금이">
장수산1
- 정지용
벌목정정(伐木丁丁)이랬거니 아람도리 큰 솔이 베혀짐즉도 하이 골이 울어 멩아리 소리 쩌르렁 돌아옴즉도 하이 다람쥐도 좇지 않고 묏새도 울지 않어 깊은 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데 눈과 밤이 조히보담 희고녀! 달도 보름 기달려 흰 뜻은 한밤 이 골을 걸음이랸다? 웃절 중이 여섯 판에 여섯 번 지고 웃고 올라간 뒤 조찰히 늙은 사나히의 남긴 내음새를 줏는다? 시름은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우노니 오오 견디랸다. 차고 올연(兀然)히 슬픔도 꿈도 없이 장수산 속 겨울 한밤내 ― .
- 《문장》(1939)
<시어 풀이>
*장수산 : 황해남도 재령군에 있는 해발 747m의 산. 황해도의 금강산으로 불림.
*벌목정정(伐木丁丁) : 커다란 나무가 베어질 때 나는 소리.
*아람도리 : 아름드리. 커다란 나무.
*멩아리 : 메아리.
*조찰히 : 아담하고 깨끗하게.
*올연(兀然)히 : 홀로 우뚝하게.
이 작품은 겨울 달밤의 산중을 배경으로 하여 탈속적 공간에서의 시련 극복의 의지를 의고풍의 어투로 드러내는 산문시이다.
화자에게 ‘장수산’은 인적이 없는 절대 고요의 공간이고, 허적(虛寂)의 공간이며, 세속적 욕망에서 벗어난 무념무상(無念無想)의 탈속적 세계이다. 깊은 산중, 겨울 달밤의 정밀과 고요는 자연을 하나의 정신적 공간으로 새롭게 인식시켜 준다. 화자는 겨울밤 눈이 쌓인 장수산 속을 거닐며 세상사의 시름으로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시련을 이겨내고자 의지를 다지고 있다.
선경후정(先景後情)의 방식으로 시상을 전개해 나가는 이 시는 다양한 감각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장수산의 정경 및 고요함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며, 예스러운 어투를 사용하여 묵직한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또, 의도적으로 시행의 종결을 거부하여 감정을 조절하면서 의문, 영탄의 어조로 화자의 감흥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7개의 문장 단위로 끊어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첫째 문장에서는 커다란 나무를 벨 때 울리는 쩌렁쩌렁한 소리를 뜻하는 ‘벌목정정’이라는 시구로 시작하고 있지만, 실제로 나무를 벤다는 뜻이 아니라 벨 때 그런 소리를 낼 만한 아름드리나무가 울창한 산의 장엄함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둘째 문장에서는 그러한 나무가 쓰러졌을 때 그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쩌렁쩌렁 골짜기를 울리면서 돌아올 만큼 깊은 산골임을 말하고 있다.
셋째 문장에서는 그 골과 울창한 숲은 ‘다람쥐’나 ‘묏새’ 같은 작은 짐승의 움직임조차 감지할 수 없을 만큼 고요하다. 여기서 ‘고요’는 장수산의 분위기를 시적 화자의 내면 의식으로 연결한다. 또, 눈 내린 밤은 종이보다 희어 그 적막감이 화자의 마음 깊이 사무치고 있다는 것이다. ‘희고녀’는 ‘희구나’의 연탄형이다.
넷째 문장에서 화자는 오늘 같은 날 때를 맞추어 보름달이 떠오른 것은 지금 같은 밤 분위기와 어울리기 위해서가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걸음이랸다?’는 ‘걷게 하려는 것인가? 의 의문형 어미다.
다섯째 문장에서 화자는 여섯 판을 내리 지고도 여유 있게 웃고 돌아간 늙은 중의 맑고 깨끗한 모습을 생각하는데, 늙은 중의 탈속적 모습이 장수산의 또 다른 이미지가 되고 있다. ‘여섯 판에 여섯 번 지고 웃고 돌아간’은 자족과 여유, 욕심이 없는 탈속적인 모습의 표현이며, ’조찰히 늙은 사나히의 남긴 내음새‘는 맑고 깨끗한 마음을 지닌 ’웃절 중‘의 여유와 자족의 초월적 정신세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줏는다?”(’줍는다? ‘라는 표현은 ’웃절 중‘을 본받게 하려는 것인가 생각하는 것이다.
여섯째 문장에는 고요 속에 밀려오는 시름에 흔들리는 화자의 내면이 드러난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에서 화자는 그 시름을 차갑고 ’올연이‘ 홀로 우뚝한 모습으로 의연하게 견디겠다고 말한다. 슬픔도 꿈도 모두 이 장수산 속의 겨울 한밤의 적막 속에 묻어 버리겠다는 것이다. ’오오 견디랸다‘에는 시름으로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시련을 이겨내고자 하는 화자의 의지가 집약되어 있다.
이 시를 다른 작품들과 비교할 때, 가장 특징적인 것은 아무래도 의고형 어미의 사용일 것이다. ‘∼이랬거니’, ‘∼고녀!’, ‘∼이랸다?’, ‘∼는다?’, ‘∼노니’와 같은 표현에서 드러나는데, 이와 같은 어미들은 대부분 영탄적 어조를 띠고 있는데, 이는 자연에서 받은 감흥을 직서적으로 드러내는 데 효과적이다. 이러한 예스러운 어투는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신비로운 느낌을 주며, 시에 담겨 있는 작가의 내면세계인 동양적 정신세계와도 잘 어울린다.
시인. 충북 옥천 출생. 섬세한 이미지와 세련된 시어를 특징으로 하는 193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초기에는 이미지즘 계열의 작품을 썼으나, 후기에는 동양적 관조의 세계를 주로 형상화하였다. 시집으로는 《정지용 시집》(1935), 《백록담》(1941) 등이 있다.
해방 후 조선 문학가 동맹(카프)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1950년 6·25전쟁 이후 월북한 이유로 그의 작품은 한동안 금기시되어 왔으나 한국시문학사에서 그가 이룩한 감각적인 시 세계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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