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출전 《조선지광》(1927)
*지줄대는 : 낮은 목소리로 자꾸 지껄이는.
*해설피 : 해가 설핏 기울 무렵.
*짚베개 : 짚을 넣어서 만든 베개.
*함추름 : ‘함초롬’의 방언. 잦거나 서려 있는 모습이 가지런하고 차분한 모양.
*성근 별 : 듬성듬성하게; 사이가 뜬 별
*서리 까마귀 : 서리 맞은 까마귀. 곧 힘없고 초라한 까마귀라는 뜻임.
향수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뜻한다. 이 시의 화자는 향토적인 시어와 다양한 감각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에는 ‘해설피’, ‘함추름’과 같이 참신하고 세련된 인상을 주는 시어와 ‘실개천’, ‘얼룩백이 황소’, ‘질화로’, ‘짚베개’ 등 토속적인 시어들은 고향의 정겨운 느낌을 제공하고, 다양한 감각적 표현을 활용하여 고향의 이미지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또,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의 후렴구는 고향에 대한 화자의 정서가 집약적으로 직접 표출되어 화자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병렬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진 연들을 하나로 연결하여 시 전체의 통일성을 주고, 형태적인 안정감을 더해준다.
이 시에는 연마다 고향의 모습을 드러내는 구체적인 장면이 나타나 있다. 풍경을 묘사하거나 인물의 모습이나 행동을 묘사함으로써 고향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는데, 1연에서는 평화롭고 한가한 고향 마을의 정경이 그려지는데 핵심 시어인 ‘실개천’이 다정하고 나긋나긋한 소리로 이야기하듯 휘돌아 나가고, 해가 설핏 기울 무렵에 옅은 햇살을 받으며 ‘얼룩배기 황소’가 운다. 고향 들판의 평화롭고 한가한 고향 풍경이다.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은 청각적인 이미지이며, ‘금빛 게으른 울음’은 청각을 시각화한 공감감적 표현이다.
2연은 겨울밤 고향의 정경과 늙은 아버지에 대한 회상과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고향의 겨울밤이 깊어지면 밤바람 소리는 왜 그리 휘몰아치는지 텅 빈 밭에 ‘말’이 달리는 소리처럼 들린다. 그런 밤에는 늙으신 아버지가 졸음에 겨워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던 모습을 회상한다.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는 청각적 이이지를 시각화한 공감각적 표현이다.
3연은 화자의 꿈 많던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을 노래한다. 순수한 동심을 지녔던 어린 시절의 화자는 꿈과 이상에 부풀어 ’풀섶 이슬‘에 발이 젖는 줄도 모르고 달렸음을 회상한다.
4연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던 구김살 없는 어린 누이와 사철 편안하게 쉴 틈도 없이 농사일에 힘겹고 고단하게 살았던 순박한 아내의 삶을 회상한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 우리 농촌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5연에 와서는 가난하지만 단란하게 사는 고향 마을의 정겨운 모습을 그려 내고 있다. ‘초라한 지붕’은 가난한 삶을 의미하며,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이라는 표현은 밤늦도록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며 단란하게 살아가는 고향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시는 향토적 정서, 시각과 청각, 공감각의 다양하고 수준 높은 감각적 이미지의 구사, 언어에 대한 각별한 배려를 보여 고향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잘 표현하고 있는 그의 대표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후일 작곡가 김희갑이 곡을 붙여 1989년 성악가 박인수가 대중가요 가수 이동원과 함께 클래식과 가곡을 접목한 노래를 부름으로써 대단한 호응을 얻었다.
▲작자 정지용(鄭芝溶, 1902~1950)
시인. 충북 옥천 출생. 섬세한 이미지와 세련된 시어를 특징으로 하는 193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초기에는 이미지즘 계열의 작품을 썼으나, 후기에는 동양적 관조의 세계를 주로 형상화하였다. 시집으로는 《정지용 시집》(1935), 《백록담》(1941) 등이 있다.
해방 후 조선 문학가 동맹(카프)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1950년 6·25전쟁 이후 월북한 이유로 그의 작품은 한동안 금기시되어 왔으나 한국시문학사에서 그가 이룩한 감각적인 시 세계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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