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 전봉건
사랑한다는 것은
열매가 맺지 않는 과목은 뿌리째 뽑고
그 뿌리를 썩힌 흙 속의 해충은 모조리 잡고
그리고 새 묘목을 심기 위해서
깊이 파헤쳐 내 두 손의 땀을 섞은 흙
그 흙을 깨끗하게 실하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
아무리 모진 비바람이 삼킨 어둠이어도
바위 속보다도 어두운 밤이어도
그 어둠 그 밤을 새워서 지키는 일이다.
훤한 새벽 햇살이 퍼질 때까지
그 햇살을 뚫고 마침내 새 과목이
샘물 같은 그런 빛 뿌리면서 솟을 때까지
지키는 일이다. 지켜보는 일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 《전봉건 시선》(1985)
▲이해와 감상
진정한 사랑은 무엇일까? 누군가를, 또는 무엇인가를 사랑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 시의 화자는 대상을 사랑한다는 것을 과목(果木)을 가꾸는 것에 빗대어 새 과목이 돋아날 때까지 들이는 온갖 정성과 보살핌이 사랑임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는 ‘사랑’이라는 관념적인 것을 ‘과목 가꾸기’라는 구체적 행위에 비유하여 표현하였으며, 시련과 고난을 드러내는 표현을 사용하여 기대가 실현되기 이전의 상황을 제시하고 있다. 또 형식 면에서는 시상 전개의 단서로 제시한 1연의 ‘사랑한다는 것은’이라는 구절을 맨 마지막에 다시 한번 제시하는 수미상관을 통해 시상의 안전을 꾀하고 주제를 강조하고 있다.
1연에서 화자는 단 한 줄의 시행만을 배치하고 있다. 이 시가 '사랑한다는 것'에 관한 시임을 단 한 줄을 통해서 강조하고 있다. 또한, 이 시행을 다시 마지막 연에서 반복함으로써 2연과 3연에서 말한 내용이 바로 '사랑한다는 것'에 관한 것임을 다시 한번 환기하고 있다. 이는 제목 '사랑'과 더불어 이 시의 모든 내용이 바로 '사랑'으로 집중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2연에서 화자는 사랑을 '과목'을 가꾸는 행위에 빗대어 나타내고 있다. 먼저 화자는 사랑을 열매 맺기 위한 준비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그동안 열매 맺지 못했던 썩은 과목을 뿌리째 뽑아 버리고, 나무를 썩게 만들었던 흙 속의 해충을 모조리 잡고, 토양이 될 흙을 튼실하게 하는 모습은 사랑의 토대를 만들기 위한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준비단계부터 정성을 다해야 함을 드러낸다.
3연에서 화자는 '사랑이란 밤을 새워서 지켜보는 일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끊임없이 상대방을 지켜보면서, 상대방이 고난과 시련에 흔들릴 때면 꿋꿋하게 옆에서 함께해 주며 힘이 되어 주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사랑이란 상대방에 대해 변하지 않는 관심과 노력이 있어야 하며, 그래야만 환한 햇살 속에서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둠’과 ‘밤’은 나무의 성장을 방해하는 시련과 고난의 상황을, ‘훤한 새벽’은 사랑이 완성되는 때를 의미한다. 마지막 4행은 1연의 '사랑한다는 것'을 반복하여 제시함으로써 수미쌍관의 구조를 이루어 시에 안정감을 주고 있다.
결국,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사랑에 방해가 되는 것을 제거하고, 사랑이 완성될 때까지 정성과 노력을 기울이며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보살피는 일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내용을 시적 표현으로 드러내고 있다.
시인. 평남 안주 출생. 1950년 《문예》에 <원(願)>, <4월>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사랑을 위한 되풀이》(1959), 《춘향 연가》(1967), 《기다리기》(1987) 등이 있다.
그는 《사랑을 위한 되풀이》를 발간한 초기에는 전재의 비인간적인 부조리를 고발하고 평화에 대한 갈망을 노래하면서 후렴을 즐겨 사용하여 음악성을 추구하였다. 《춘향 연가》(1967)를 내놓은 중기에 와서는 사물에서 독특한 이미지를 포착하여 초현실주의적 경향이 강한 시를 많이 썼다. 그리고, 《기다리기》를 간행한 후기에는 동화적 순수성과 정신주의 추구라는 두 가지 특성을 드러내는 시와 함께 실향민의 향수와 수석에 관한 관심을 상상력의 원천으로 하는 시를 즐겨 썼다.
/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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