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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폭포 / 이형기

by 혜강(惠江) 2020. 3. 15.

 

 

 


폭포  

 

 

- 이형기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을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

시퍼런 칼자욱을 아는가.

 

질주하는 전율과

전율 끝에 단말마(斷末魔)를 꿈꾸는

벼랑의 직립(直立)

그 위에 다시 벼랑은 솟는다.

 

그대 아는가

석탄기(石炭紀)의 종말을

그때 하늘 높이 날으던

한 마리 장수잠자리의 추락(墜落).

 

나의 자랑은 자멸(自滅)이다.

무수한 복안(複眼)들이

그 무수한 수정체(水晶體)가 한꺼번에

박살나는 맹목(盲目)의 눈보라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시퍼런 빛줄기

2억 년 묵은 이 칼자욱을 아는가.  

 

 

- 적막강산(1963)

 

 

<시어 풀이>

 

단말마(斷末魔) : ‘임종’(臨終)을 달리 이르는 말. 혹은 숨이 끊어질 때의 모진 고통.

석탄기(石炭紀) : 지질 시대의 하나. 거대한 양치식물이 많았고 파충류와 곤충류가 나타났다.

복안(複眼) : 겹눈, 홑눈이 벌집 모양으로 여러 개 모여 된 눈

수정체(水晶體) : 안구의 동공 바로 뒤에 붙어 있는 볼록 렌즈 모양의 탄력성 있는 투명체

맹목(盲目) : 눈이 멀어서 보지 못하는 눈. 혹은 이성을 잃어 적절한 분별이나 판단을 못하는 일.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자연물인 폭포에 관념적 이미지를 대입하여 일상적인 삶에서 느끼는 존재의 비극적 상황에 대한 인식을 노래하고 있는 관념시이다.  이 시의 발화 주체인 화자 ''는 시인 자신이 아닌 ''이다. 이 시의 대상인 '폭포'는 산의 깎아지른 벼랑을 타고 흘러내리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수직으로 떨어져 내리는 폭포의 물줄기와 거기서 품어져 내리는 굉음은 보는 이를 단번에 압도한다. 그러나 '폭포'는 단순히 자연적 소재가 아니라, 시인의 뛰어난 상상력에 의해 관념적인 이미지를 대입시킨 형상물이다. 그곳에는 숨 막히는 긴장감과 까닭 모를 서글픔이 있다.

 

 존재의 본질을 비극적으로 인식하는 화자는 존재의 비극성을 인간의 오랜 숙명으로 받아들일 뿐 어떤 긍정적 전망도 끝내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이 시는 관념적 이미지로 자연적 소재를 바라보고 있으며, 시적 대상을 직접 드러내지 않은 채 암유의 기법을 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각 연을 4행으로 배치하면서 1, 3, 5연의 '그대 아는가'의 동음 반복, '그대 아는가 ~을 아는가'의 통사 구조 반복을 통해 내재된 운율적 효과를 노리고 있다. 또한, 시의 앞뒤에 유사한 내용을 배치한 수미상관의 구조 역시 운율을 형성하며, 구조적 완결성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운율마저 규칙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3연에서처럼 도치를 통한 통사 구조의 반복에 변화를 줌으로써 다양화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산 자체가 시적 화자가 되어 고통을 지니는 존재로 자신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데, 1연은 폭포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그대'는 사람이고 ''는 산인 것이다.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시퍼런 칼자국'의 모습은 주체인 ''의 입장에서 보면 지울 수 없는 고통의 멍에이며, 자신의 몸에 시퍼런 칼자국이 있다는 것은 화자인 산이 처해 있는 상황이 비극적임을 알 수 있다.

 

 2연에서는 폭포의 생성에 대하여 묘사하면서 섬뜩한 속도감과 벼랑을 타고 내리는 폭포의 모습을 보여 준다. ‘질주하는 전율에서는 무시무시한 속도감을 느낄 수 있으며, ‘전율 끝에 단말마는 숨이 끊어질 때의 마지막 힘을 쓰는 정황을 은유한 것이며, ‘벼랑의 직립은 절망적 상황에 맞서는 것인데, 폭포는 그 위에 다시 벼랑이 솟는다고 한다. 3연에서는 폭포의 모습이 장수잠자리로 묘사되어 벼랑을 타고 쏟아져 내리는 폭포의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다.

 

 4연에서는 폭포수가 떨어지면서 물방울들이 사방으로 부서져 흩어지는 모습을 은유적으로 맹목의 눈보라로 형상화되어 있다. 여기서 물방울의 보조관념으로 쓰인 복안수정체인식이나 지향의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물살들이 박살나는상황은 존재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소망과 의지가 무참히 좌절됨을 의미한다.

 

 마지막 5연은 떨어지는 폭포의 시퍼런 물줄기가 자신에게는 아주 오래된 상처라고 인식하고 있다. 이는 존재에 대한 시인의 비극적 인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2억 년 묵은 이 칼자욱의 존재가 지닌 변하자 않는 근원적 비극성을 인식한 것으로, 이는 인간의 오랜 숙명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이 시는 자연 현상을 객관적 시각에서 긍정적으로 바라본 것이 아니라 시인 자신의 내적 체험을 바탕으로 주관의 비극적 정서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와 같은 폭포에 관한 시인의 인식은 끝없이 절망하는 실존적 존재인 인간의 삶의 모습이다. 추락할 수밖에 없는 실존적 한계를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또다시 '하늘 높이 날'고자 하는 인간 존재의 비극적 모습이 미약한 '장수 잠자리'를 통해 잘 나타나고 있다.

 

 

 

작자 이형기((李炯基,1933~2005)

 

 

 시인. 경남 진주 출생. 1949년 중학생 시절 문예지를 통해 등단, 최연소 등단기록을 세우고, 1950 <코스모스> <강가에서> 등이 서정주와 모윤숙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적막강산(1963), 돌베개의 시(1971), 꿈꾸는 한발(1975), 풍선 심장(1981), 보물섬의 지도(1985), 심야의 일기예보(1990], 죽지 않는 도시(1994), 절벽(1998) 등이 있다.

 

 초기에는 투명하고 아름다운 서정을 절제 있는 언어로 형상화하였으나 점차로 모더니스트 적인 기법을 구사하여 서정을 지적으로 세련 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이형기는 사물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을 토대로 존재론적 진실을 추구하는 시들을 썼다. 그는 평론 분야에서도 크게 활동하여 감성의 논리, 한국문학의 반성, 시와 언어 등의 시론집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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