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네이버 블로그 '장다리꽃(wmk6393)'>
황혼에 서서
- 이영도
산이여, 목 메인 듯
지그시 숨죽이고
바다를 굽어보는
먼 침묵은
어쩌지 못할 너 목숨의
아픈 견딤이랴.
너는 가고
애모(愛慕)는 바다처럼 저무는데
그 달래임 같은
물결 같은 내 소리.
세월은 덧이 없어도
한결같은 나의 정(情).
- 《석류》(1958)
▲ 이해와 감상
여류 시인 이영도가 1958년에 발표한 이 시는 애모(愛慕)를 주제로 한 연시조이다. 사랑을 육성으로 외치는 것이 아니라 고결한 영혼으로 애모의 정과 꺾이지 않는 인내를 노래하고 있다.
첫 시조는 산을 노래하면서 시인 자신의 아픔을 노래한다. 둘째 시조는 시인 자신의 한결같은 정을 노래한다. 이영도 시인은 산과 물, 그 거대한 자연에 자신의 애정을 실어 탄주(彈奏) 한다. 그래서 그의 시조의 특성은 자연으로 시작해서 인간으로 마무리하는 기법이다. 산과 바다는 숙명적인 자연이다. 산이 있기에 바다가 있고, 또한 바다가 있기에 산이 있다. 그 둘은 매우 대조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상승과 하강 이미지를 대표하는 하늘과 땅속의 세계를 보여준다.
시인 자신이 고백한 바와 같이 "산은 항상 내게 묵중하라 타이르고, 바다는 자꾸 몸부림치라 한다. 노을은 곱게 타라고만 하고 바람은 함께 흐르자고 한다"라는 이율배반적인 심리는 그의 시조에서는 담담하게 처리되고 있다.
그러나 여성이라기보다는 남성적인 것으로, 뜨겁고 무거운 지열(地熱) 같은 입김이 전편에 서리어있어 작가의 작품세계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즉, 한국 여인이 갖는 내면의 정이 아닌, 시에의 강렬한 충돌에서 자기 분신(焚身)에 이르는 종교적인 애정이 이 시에 짙게 배어나 있다.
우리는 애모를 주제로 한 <황혼에 서서>를 살피면서, 이 글의 작자 정운 이영도와 청마(靑馬) 유치환(柳致環) 사이의 사랑과 이별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미모와 재색을 고루 갖춘 규수로 21살에 출가해서 딸 하나를 낳고, 스물아홉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살아가던 정운은 자신이 교사로 근무하는 통영여중에서 청마를 처음 만났다. 청마가 해방되자 자신의 고향인 통영으로 돌아와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의 국어 교사로 부임했기 때문이다.
그때, 남보다 피가 뜨거운 서른여덟 살의 청마는 스물아홉의 청상과부 정운을 만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의 불길이 타올랐다. 청마는 거의 매일 통영의 중앙우체국을 찾아 우체국에서 불과 50여m 떨어진 곳에 사는 정운의 집을 바라보며 편지를 썼다.
그러나, 정운에 대한 청마의 사랑은 현실적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이었기에 퍽 고통스러운 사랑이었다. 그 시절 청마는 이미 서른여덟의 유부남이었고, 정운 역시 자식을 가진 미망인으로서 그들의 사랑은 유교적 가치관과 세상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런 까닭으로 정운은 청마의 <그리움>의 한 구절처럼 청마의 끈질긴 구애(求愛)에도 물같이 까딱하지 않았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통영 앞바다에서 바위를 때리는 청마의 시 <그리움>은 ‘뭍같이 까딱 않는’ 정운에게 바친 사랑의 절규였다.
그러기를 3년, 날마다 배달되는 편지와 청마의 사랑 시편들이 마침내 빙산처럼 까딱 않던 정운의 마음 녹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두 사람의 사이의 아름답고 고귀한 정신적 사랑은 시작됐으나 이들의 만남은 거북하고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은 애초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숙명일 수밖에 없었고, 청마의 가슴 속에 자리한 연정은 가슴 저미는 쓰라림으로 남아 있곤 하였다.
다가갈 수도, 그렇다고 멀어질 수도 없는, 그런 이유로 서로를 향한 그리움에 매일 하루같이 목 놓아 울지만 끝내 다가갈 수 없는 섬처럼 파도처럼 그들의 사랑도 그러했다. 그들이 나눈 20여 년의 사랑은 무려 5천 통에 이르는 편지 속에 담겨 전해진다. 이런 두 사람 사이의 순애보 적인 사랑은 청마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함으로 끝이 났다.
그토록 사랑하며 애태우던 사람의 비보를 접했을 때 정운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이룰 수 없었던 사랑이기에 더욱 가슴 아프고, 떠난 사람에게 향한 사랑의 절절함은 그만큼 컸을 것이다. “너는 가고/ 애모(愛慕)는 바다처럼 저무는데// 그 달래임 같은/ 물결 같은 내 소리.// 세월은 덧이 없어도/ 한결같은 나의 정(情)” ‘너’는 가고 없지만, 애모의 정은 고결한 영혼의 울림이 되어 울려오는 듯하다.
호는 정운(丁芸), 시조시인. 경북 청도 출생. 시조시인 이호우(李鎬雨)의 누이동생이다. 1945년 대구의 문예동인지 《죽순(竹筍)》에 시 <제야(除夜)>를 발표하면서부터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바람>(1956), 지리산시초)>(1957), <황혼에 서서>(1958), <설악산시초>(1959), <목련화>(1965), <수혈(輸血)>(1965), <아지랑이>(1966), <나목(裸木)>(1967), <백록담>(1968), <구천동소묘>(1970) 등이 있다.
그는 민족 정서를 바탕으로 잊혀져 가는 고유의 가락을 재현하고자 하는 한편, 여성의 맑고 경건한 계시주의(啓示主義)와 한국적 전래의 기다림, 연연한 낭만적 정서를 섬세하고 감각적인 언어로 표현하였다. 말년에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많아 썼다.
대표작 <황혼에 서서>는 애모를 주제로 한 것이면서도 나약하지 않은 강렬한 자기 분신(焚身)에 이르는 종교적인 애정을 노래하였다. <아지랑이>에서는 현대시조의 연작 형식을 벗어나 자유시 이상의 자재성(自在性)을 보인 새로운 형식을 실험하였다.
시조집으로 《청저집(靑苧集)》(1954), 《석류》(1968)가 있고 수필집으로 《춘근집(春芹集)》(1958), 《비둘기 내리는 뜨락》(1966), 《머나먼 사념(思念)의 길목》(1971) 등이 있다. 후기의 수필은 구도적인 면과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는 등 사색적인 면과 현실적 관심을 함께 드러냈다.
/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문학관련 > - 읽고 싶은 시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폭포 / 이형기 (0) | 2020.03.15 |
---|---|
낙화(落花) / 이형기 (0) | 2020.03.15 |
아지랑이 / 이영도 (0) | 2020.03.14 |
강강술래 / 이동주 (0) | 2020.03.14 |
오렌지 / 신동집 (0) | 2020.03.13 |
댓글